일전에 친구들과 정과 법과 격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였다. 그때 한 친구가 한국 사람은 정에 살고, 미국 사람은 법에 살고, 유럽 사람은 격에 산다는 재미있는 말을 했던 게 기억난다. 세 지역의 특징을 이처럼 촌철살인(寸鐵殺人)격으로 적확하게 표현하는 말이 더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정운현은 그의 저서 ‘정이란 무엇인가’에서 정을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부부간의 정, 형제간의 정, 남녀간의 정, 친구간의 정, 사물을 사랑하는 물정(物情)이 그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정은 한국인의 마음이고, 한국인에게 정은 그 몹쓸 사랑이라고 적고 있다. 경북 의성군 봉양문화마을에 사는 프랑스 출신의 뒤퐁 주교는 사제 서품을 받은 이듬해 우리나라에 온 뒤로 반세기 이상을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그는 한국인의 인정(人情)은 세계에 수출할 심리상품이라며 한국의 정(情) 문화를 극찬하고 있다. 그처럼 한국인의 정에 매료돼 한국에 뼈를 묻기로 한 외국인이 한둘이 아님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다.

일찍이 한국인의 정서를 깊이 있게 탐구하고 이를 글로 많이 남겼던 언론인 이규태는 ‘정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색깔도 없다. 냄새도 나지 않고 맛도 없다. 무형(無形), 무상(無相), 무취(無臭), 무미(無味)다. 그렇다면 구상세계에서는 없는 것이다. 분명히 없는데 있는 것이 정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인의 정이 얼마나 복잡 미묘한 것인지는 정을 외국어의 한 단어로 쉽게 번역이 안 된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일례로 정을 영어로 sympathy, compassion, affection 등으로 번역하는데 이중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정과는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법은 어떠한가. 과거 유학시절 기거할 월세 아파트를 구해 집 주인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변호사와 계약할 때의 일이다. 우리 같으면 아무리 고가의 아파트라 하더라도 전월세 계약서는 두 장을 넘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계약서는 약간 과장을 하면 거의 책 한 권에 달한다. 그 안에는 임대인과 임차인의 인적사항을 비롯해 아파트의 면적, 구조 등 기본사항뿐만 아니라 방의 경우 문과 창문의 방향, 크기, 상태, 조명등의 수, 벽과 바닥의 상태 등에 대한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기술되어 있었다.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아파트를 되돌려 줄 때 계약 당시 상태 그대로 되어 있어야 함은 불문가지다.

계약에 익숙지 않았던 당시 젊은 학생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의 그러한 까다로운 행태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차츰 사회생활을 통해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그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법의 한 종류인 계약서는 분쟁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한 가장 중요한 증빙서류가 되는 만큼 가급적 자세하고 구체적일수록 상호이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격은 어떠한가.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격은 주위 환경이나 형편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라고 정의되어 있다. 격을 얘기할 때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의례(儀禮), 의전(儀典) 등일 것이다. 영국에서 꽃꽂이전문가(florist)로 활동하고 있는 친구 딸의 경우이다. 그는 현재 어느 부호 대저택의 꽃 장식을 도맡아 하고 있는데 이제까지 한 번도 그 저택 내부를 들어가 본적이 없다고 한다. 자기는 저택 특정장소에서 꽃 장식을 해놓으면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그것을 집 내부로 옮겨간다고 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은 사생활이 지켜져야 하는 개인공간이라는 것이다.

정 ‧ 법 ‧ 격 모두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한 인격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일 게다. 이중 어디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두느냐는 그 나라, 그 지역의 문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느 게 더 우월한 문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점차 국경 개념이 없어지고 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변해가고 있는 현대에는 세 가지덕목 중 어느 하나에 치우치기보다는 이들을 두루 갖춰야만 진정한 교양 있는 시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 엔디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