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ㆍ3은 세계인의 기록이자 역사이다

[이창호 박사 특별기고]  4월의 따사로운 햇살 사이로 흐드러지게 꽃비가 내리는 즈음, 우리는 결코 지워서도 잊어서도 안 되는 제주 4·3과 만나게 된다.

제75주년 4ㆍ3희생자 추념식 식장에서 필자
제75주년 4ㆍ3희생자 추념식 식장에서 필자

필자는 이번 75주년 제주 4·3 희생자추념식에 참석하며, 많은 생각들과도 만나게 되었다. 또 제주4ㆍ3은 세계인의 기록이자 역사이다.

제주 4·3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을 일컫는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4·3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2만 5,000∼3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가옥 4만여 채가 소실되었으며, 중산간 지역의 상당수 마을이 폐허로 변했다. 학교·면사무소 등 공공기관 건물이 불탔으며 각종 산업시설이 파괴되었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약칭 : 4·3위원회)가 확정한 희생자 수는 2020년 기준으로 1만 4,532명이다.

이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수치일 뿐, 진상조사보고서는 4·3 당시 인명피해를 2만 5,000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한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특히 19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이루어진 ‘초토화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1954년 9월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후 중산간마을 주민들 상당수는 원주지를 찾아 돌아갔으나, ‘공비출몰 지역’이라 하여 자주 소개 대상이 된 지역과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희생된 흔적이 남아 있는 일부 마을은 복귀를 원하지 않는 주민들도 많았다.

이로 인해 제주도내 각지에는 4·3 이후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들이 남아있는데, 이는 4·3으로 인해 소실된 마을, 곧 ‘잃어버린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잃어버린 마을’은 4·3 때 집중적인 피해를 입은 마을 가운데 일부로서, 주민들이 돌아와 마을을 이전처럼 복원하지 못해 버려지거나 단순 농경지로 바뀌면서 더 이상 마을로 형성되지 않고 사라진 경우를 말한다.

4·3의 또 다른 아픔은 당시 사망·행방불명된 사람들의 무고한 희생이 당대에 그치지 않고 그 유가족들에게 대물림되었다는 것이다.

사건 과정에서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사법 처리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자 유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 활동에 심한 제약을 받아왔다.

1980년 8월에 이르러서야 국가보위비상대책 상임위원회는 연좌제를 폐지할 것을 발표했고, 1981년 3월 내무부는 후속 조치로 연좌제 폐지 지침을 발표했다.

1980년에 제정된 제5공화국 헌법(제12조 3항)과 제6공화국 헌법(제13조3항)에도 연좌제 금지를 명문화했다.

제주도의 일부 마을에는 4·3으로 인한 상흔을 씻고 주민간 화합을 도모하고자 마을 단위별 4·3희생자와 호국영령, 순국선열 등을 함께 추모하기 위한 영모원(英慕園), 추모원(追慕苑) 등의 공간이 조성되고 있고, 제주도 곳곳에 4·3과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 등으로 집단 학살당한 희생자들의 위령(慰靈) 공간이 조성됐다.

뿐만 아니라 4·3 당시 위험에 처한 주민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힘썼던 의인(義人)들을 기리는 공덕비도 세워지는 등 4·3사건으로 희생당한 4·3영령들을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한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1989년 제주도내 11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제주4·3사월제공동준비위원회가 ‘제1회 4·3추모제’를 봉행함으로써 위령제는 공식행사로 치러지게 됐다.

1990년 6월 유족들은 ‘제주도4·3사건 민간인희생자 유족회’를 조직했고, 1991년 4월 처음으로 유족들이 주체가 된 4·3사건희생자위령제를 봉행했다.

이때부터 유족회와 시민 사회단체들은 4·3위령제와 4·3기념행사를 각각 따로 치렀는데 1994년 제주도의회가 중재에 나서서 민간인희생자유족회와 ‘사월제공준위’가 공동으로 위령제를 봉행하게 되었다.

1997년에는 4·3의 상처를 범도민적으로 승화시킨다는 취지로 ‘제주4·3사건 희생자위령사업 범도민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4·3 50주년인 1998년부터 매년 합동위령제를 봉행했다.

4·3특별법이 제정된 2000년부터는 ‘제주4·3사건 희생자 범도민위령제’로 명칭을 바꿨고, 새로 확보한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 부지에서 봉행됐다.

2006년 4·3 위령제에는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여 제주도민들에게 다시 공식 사과하고 참배했다.

4·3희생자 추념일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한 것은 정부의 진상보고서 확정, 대통령의 사과에 이은 4·3의 국가적 해결 과제 중 마지막 안건을 해결한 것이다.

2012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후보는 추념일 지정을 제주지역 대선의 주요 공약으로 제시했다.

2013년 8월 국회는 4·3특별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4·3 법정 기념일과 관련해 부대 의견으로 대통령령인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 4·3추념일을 법정 기념일로 지정하도록 명문화함으로써 법정 기념일 지정의 초석을 마련했다.

결국 2014년 3월 18일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고 3월 24일자 관보에 게재함으로써 ‘4·3희생자 추념일’ 지정을 위한 대통령령 개정안이 마침내 공포됐다.

법정 기념일 지정을 계기로 4·3문제의 해법은 국민통합과 화합의 국정 과제를 실현한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4·3사건을 둘러싸고 이념 논쟁과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많은 이들의 가슴에 또 다른 아픔을 만들고 있다.

혹자는 지난 20년간 보수정당의 국회의원이 단 한명도 배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주의 정치적 편향성을 주장하지만, 이는 4.3에 대한 접근 방식과 태도의 차이 때문이라는 해석이 뒤따른다. 그만큼 보수정권에서 4.3은 엄혹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현재 4.3평화공원은 사업비 258억 원을 들여 하부대지에 4.3국제평화문화센터, 4.3트라우마치유센터, 빛의 통로 등을 조성하는 내용의 활성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새롭게 들어서는 시설은 앞서 조성된 4.3평화공원의 기존 방향성을 유지하면서 중복을 피하고 새로운 기능을 부여해 상호 보완기능을 유지하는 데 목적을 뒀다.

윤석열 정부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지만, 보수정권에서의 4.3홀대 이력과 최근 극우세력이 준동하는 흐름을 보면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국가트라우마센터와 관련해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다.

이제는 지금까지의 갈등과 불협화음을 걷어내고, 그 어떤 정치적 속내와 이념적 갈등이 새어들지 못하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 모두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과거의 폭력과 갈등을 녹여내어 화해와 미래의 불꽃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제주 4·3이 전하는 따스한 봄의 노래는 바로 그것이 아닐까 한다.

글: 이창호

신코비전략포럼 상임대표

사진: 제75년4ㆍ3희생자 추념식 식장에서 필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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