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회 칼럼니스트
허정회 칼럼니스트

  얼마 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마침 담당자가 회사를 방문한다기에 떡 본 김에 제사 지냈다. 사전연명의향서란 19세 이상 성인이 향후 자신이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됐을 때를 대비해 연명의료를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문서다. 이에는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체외생명유지술, 수혈 및 혈압 상승제 투여 등이 있다. 

  이런 제도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동안 주변에서 임종을 목전에 둔 환자의 연명치료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가족 사이에 의견이 분분한 경우를 많이 봐왔다. 삶의 주인으로서 삶을 매듭짓는 일을 사전에 해놓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이 제도는 1997년 ‘보라매 병원 사건’이 불씨가 되었다. 의학적 권고에 반하는 환자의 퇴원에 대해 의료진 및 가족을 살인죄 및 살인방조죄로 인정한 판례였다. 그러다가 2009년 ‘김 할머니 사건’으로 대법원 판결이 뒤집어졌다. 대법원은 평소 본인의 연명치료 거부의사에 근거한 가족의 요청으로 연명치료 중단을 인정했다. 이 판례가 계기가 돼 2016년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됐고, 2018년 2월부터 연명의료결정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의하면 2022년 2월 현재 사전의료연명의향서 등록인 수는 121만 여명이다. 우리나라 인구 대비 약 2.3%에 지나지 않는다. 이 중 남자 약 30%, 여자 약 70%로 여자가 남자에 비해 2배를 웃돈다. 연령대별로는 70대(44.1%), 60대(25.1%), 80대(18.6%) 순으로 60대 이상이 대부분이다. 1993년부터 시행한 미국은 36.7%가 등록했다고 한다. 

  연명의료관리센터 직원으로부터 사전연명의향서의 효력, 철회 등 6가지 숙지사항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 받은 후 서명했다. 이제 필자가 임종에 처했을 때 가족들의 고민거리 중 하나를 미리 해결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필자는 이 제도를 좀 더 많은 국민이 인지하고 동참할 수 있도록 광범위하게 홍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테면, 병원에서 건강검진 할 때 문진표에 이를 포함시켜 등록 의사를 타진토록 하는 것이다. 또는 노인들의 왕래가 잦은 병원이나 복지관 등에 관련 홍보물을 비치해 등록을 유도할 수도 있겠다.

  얼마 전 이 시대의 지성, 이어령 교수께서 타계했다. 그는 5년 전 췌장암이 발병해 두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항암치료는 거부한 채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한다. 언론에 비친 마지막 사진을 보면 깡마른 모습이지만 안면에서 뿜어 나오는 품위만은 감출 수 없었다. 선생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의식을 놓지 않고 죽음과 마주했다고 가족은 전한다. 고인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과 폐회식의 총괄 기획을 주도했다. 문화부장관 재직 시에는 국립국어원과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설립해 문화계 발전에 기여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아이디어를 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석학으로 꼽혔다.

  최근 김여환 가정의학 전문의가 「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을 펴냈다. 1000명 환자의 임종을 지켜본 호스피스 의사가 전하는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말한다. “인생은 좋은 죽음을 맞기 위해 살아가는 과정 같아요. 죽음에 이르면 연민과 사랑 같은 따뜻함이 묻어날 때도 있지만, 사람사이에 얽힌 갈등, 돈과 욕심 등 삶의 희로애락이 그대로 죽음으로 이어진다. 시간과 마음을 투자해 죽음을 배우면 죽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 또한 미리 준비해야 한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우리 모두 죽음을 떠올리면서 살자. 그럴 때 현재를 더 충실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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