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회 칼럼니스트
허정회 칼럼니스트

  화창한 6월 첫 주말 충남 태안에 있는 천리포수목원을 다녀왔다. 그동안 여러 번 그 앞을 지났지만 이번 처음으로 들렀다. 한 마디로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규모도 규모려니와 난생 처음 만나는 수목이 부지기수였다. 이제까지 필자가 다녀본 수목원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 많은 꽃과 나무가 하나같이 있어야 할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꾸민 사람이 민병갈이다. 그는 192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작은 광산마을 피츠톤에서 태어났다. 대학 졸업 후 1943년 미 해군 정보장교로 임관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일본에 주둔하던 중 인천 월미도 상륙작전으로 한국에 첫 발을 디뎠다. 1946년 제대 후 귀국했다가 이듬해 미 군정청 정책고문관으로 한국에 다시 왔다. 1951년 한국전쟁 중 피난 차 출국해 일본에 머물다가, 1952년 다시 입국해 한국은행에 자리 잡았다. 전쟁 후 1954년 한국은행총재 고문으로 정식 취업해 1982년 정년퇴임했다. 그 후 증권회사 고문 등을 지내다 2002년 4월8일 그가 평생 일군 수목원에 묻혔다.

“첫 발을 디딘 인천에서 내 눈에 들어온 한국 산하가 낯설지 않았다. 만일 미 해군이 나를 일본에 파견했다면 나는 아시아에 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고 싶었던 한국에 파송된 것은 더없는 행운이었다. 한국에 온 지 한 달쯤 됐을 때 음식점에서 처음 먹어본 김치가 입에 잘 맞았다. 한국 어디를 가도 고향에 온 듯 편했고, 한국인 누구를 만나도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친밀감이 들었다. 전생에 나는 아무래도 한국인이었던 것 같다.” 민병갈이 마주한 한국에 대한 첫 인상이다.

민병갈이 천리포와 인연을 맺은 건 1961년 6월이었다. 여름휴가 차 만리포해수욕장에 왔다가 천리포를 알게 되었다. 그가 50세 때 일이었다. 1962년 매입한 천리포해변 땅 6천 평이 오늘날 18만 평 천리포수목원으로 거듭났다. 1964년 서울대농대 이창복, 현신규 교수 도움을 받아 식물공부에 천착했다. 이 교수는 당시 어느 제자보다도 더 많이 물어왔다고 회고했다. 1970년 개인정원을 꾸미기 시작했고, 1973년 수목원으로 전환하기로 결심한 후 본격적으로 수목원 조성사업에 나섰다. 1975년 한국으로 귀화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3년 동안 모친을 설득한 끝에 1978년 귀화 신청을 했고, 1979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한국에 정착한 이래 한국이름을 갖기 원했다. 당시 친구였던 민병도(閔丙燾) 한국은행총재 성씨와 중간자를 돌림으로 하고 자기 본명(Carl Ferris Miller)의 첫 이름을 마지막에 붙여 민병갈(閔丙渴)로 작명했다. 본을 펜실베이니아 민씨로 등록하기 원했으나 여의치 않아 친구와 같은 여흥(驪興) 민씨로 입적하였다.

수목원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2층으로 아담하게 지어진 ‘민병갈기념관’이 있었다. 생전 사무실로 사용하던 곳을 기념관으로 꾸몄다. 한옥을 좋아해 한옥에서 살았던 그는 사무실도 초가집을 형상화해 지었다. 기념관에는 그가 사용하던 유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는 기록의 달인이기도 해 그날 작업일지를 일기형태로 작성했다. 그는 사진 찍기를 즐겼다. 그가 찍은 사진에서 그의 긍정적인 사고를 엿볼 수 있었다. 그는 당시 전쟁 폐허에서 허덕이는 비참한 모습보다는 오밀조밀한 한국 풍광과 친절하고 따뜻한 한국인을 주로 찍었다.

이번 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수목원을 돌아보면서 인간이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가를 새삼 느꼈다. 그는 버려진 척박한 땅을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주말을 맞아 많은 탐방객이 수목원을 누비고 있었지만 워낙 넓어 여유가 있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이 있다. 남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언젠가는 목적을 달성한다는 뜻이다. 천리포수목원을 거닐면서 그가 이루어놓은 기적에 몇 번이나 전율을 느꼈다. 평생 혼자 산 그는 진정 한국과 결혼한 사람이었다.

저작권자 © 엔디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