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회 칼럼니스트
허정회 칼럼니스트

  달포 전 강원도 봉평에 있는 가산(可山) 이효석(李孝石) 문학관을 찾았다. 봉평은 꼭 한 번 가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다가 이번에 큰마음 먹고 들렸다. 필자 머릿속에 있는 봉평은 왠지 비탈이 많은 산촌으로 각인돼 있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넓은 들도 많았다. 봉평 하면 제일 먼저 하얀 메밀꽃이 떠오른다. 이효석의 유명한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 때문이리라. 메밀은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구황작물(救荒作物)이다. 하지만 올해는 지난여름 물난리로 인해 파종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작황이 형편없어 보였다. 또 코로나19로 인해 매년 9월 초중순에 열리는 효석문화제도 취소 됐다. 이 문화제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100만 명이 이 작은 마을에 몰린다고 하니 이효석의 가치는 실로 대단하다.

이번 나들이 덕에 이효석의 편린을 엿볼 수 있게 됐다. 또 ‘메밀꽃 필 무렵’을 비롯해 그의 여러 소설을 다시 한 번 읽은 것도 이번 여행의 큰 수확이다. 이효석 문학관은 봉평 읍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약 8천 평에 달하는 넓은 부지에 200평 규모의 아담한 건축물로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문학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1년에 약 300만 명이 다녀간다는 문학관 초입에는 이효석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1년 선배인 현민(玄民) 유진오 (兪鎭午) 박사가 쓴 ‘可山李孝石文學碑’가 세워져 있었다. 문학관은 전시실, 자료실, 문학교실 및 연구실 등으로 꾸며져 있었다. 입구에 있던 해설사가 해설을 자청했다. 그의 해설은 거침없었고, 1시간 동안 이어진 재미있는 해설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가 ‘메밀꽃 필 무렵’의 한 구절을 읽을 때는 마치 시 낭송을 듣는 것 같았다.

이효석의 삶은 굴곡이 많았다. 이효석은 1907년 봉평면에서 부친 이시후와 모친 강홍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 부친을 따라 서울로 이주했고, 1912년 다시 봉평으로 내려와 서당을 다녔다. 1925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문학에 입문했다. 1930년 동 대학 영문과 졸업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소설과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31년 동성동본이라는 난관을 뚫고 함경북도 경성(鏡城) 출신이자 화가 지망생 이경원(李敬媛)과 결혼했다. 1932년 경성으로 이주해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취직했다. 1933년 정지용, 유치진 등과 함께 모더니즘 문학단체인 구인회(九人會)에 참여했다. 1936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했고, 바로 이해 그의 대표작인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했다. 1940년 부인 이경원과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고, 1942년 결핵성 뇌막염으로 짧은 인생을 마쳤다.

이효석은 준수한 외모를 지닌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항상 서양풍의 깔끔한 옷차림으로 생활했으며 의지가 굳고 개성이 강했다. 이효석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던 사람이었다. 이효석은 공부면 공부, 문학이면 문학, 음악이면 음악 등 어느 분야에서나 두각을 나타낸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서재에는 클래식 음반을 즐겨 듣던 축음기, 글 쓰다 막히면 건반을 두드리던 피아노가 있었다. 또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이효석은 영문학을 전공했을 만큼 서구 문물을 동경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거실 벽에는 ‘Merry X-Mas!’와 함께 프랑스 영화 ‘금남(禁男)의 집’에서 여우 주연을 맡았던 다니엘 다리외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 사진으로 인해 부인 이경원과 크게 다투었다는 해설사의 재미있는 설명이 있었다.

이효석은 그 시대 대부분 엘리트가 그랬듯 불운한 천재였다. 시대만 잘 타고 났다면 얼마든지 큰 뜻을 펼칠 수 있었던 인재였다. 문학관을 나오면서 이효석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 4권짜리 소책자를 기념품으로 구매했다. 효석은 파주시 동화경모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언젠가 파주시를 지날 때 잊지 않고 들려 요절한 천재, 이효석을 참배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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