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회 칼럼니스트
허정회 칼럼니스트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에 폭우가 쏟아졌던 지난달 초 고등학교 친구들과 지리산 노고단에 올랐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내려간 그 전날부터 장마구름이 북상해 남부지방은 소강상태였다. 교통편은 용산역을 출발해 구례구역에 도착하는 무궁화 열차를 이용했다. 그런데 하필 제일 하급열차에 나라꽃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겠다. 최근 일각에서 국화(國花)를 개나리나 진달래 등 우리 꽃으로 바꿔야 한다는 논란이 일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애국가 후렴구에도 있는 엄연한 나라꽃 아닌가. 코레일 측의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나름대로 완행열차로 여행하는 맛이 쏠쏠했다. 무엇보다 여러 역에 정차해 고속전철처럼 급하지 않고 여유가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역도 많았다. 타임머신을 50년 뒤로 돌려 마치 수학여행 가는 것 같았다. 나는 한 친구와 수담(手談)을 즐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 가지 불편했던 점은 열차 내에서 무려 5시간 가까이 마스크를 써야 하는 것이었다. 승무원이 수시로 지나다니면서 착용 여부를 점검했다. 언제나 이 코로나 대란이 끝날 런지! 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12시가 됐다. 점심으로 준비했던 햄버거가 생각보다 양도 많고 내용도 충실했다. 일본은 ‘에끼벤(驛弁)’이라고 기차에서 먹을 수 있는 도시락이 아주 훌륭하다. 우리는 아마도 일부러 도시락을 못 먹게 하려는 듯 용산역 구내 하나 있던 가게마저 자취를 감췄다. 기차여행 맛 중 하나가 여유 있게 도시락을 즐기는 건데 많이 아쉬웠다.

예정보다 약 10분 늦게 구례구역에 도착했다. 구례구(求禮口)역은 구례군이 아닌 순천시에 소재해 구례 입구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린다. 노고단에 오르기 위해서는 노고단 대피소를 4시까지는 통과해야 한다. 노고단은 탐방 예약제를 실시하고 있을 정도로 등산객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시간이 촉박했다. 비도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비가 이만한 게 얼마나 다행인가. 오후 4시 입산 통제시한 1분을 남기고 간신히 통과했다. 운이 좋았다. 고산지대라 이제까지와는 달리 관목만 눈에 띄었다. 길섶에 핀 각시원추리가 반갑게 맞는다. 공기 좋은데서 자라선지 꽃잎이 유난히 청초하다. 좀처럼 보기 힘든 각시원추리 군락지도 있다. 드디어 노고단에 닿았다. 날이 흐려 시계(視界)는 좁지만 그래선지 더욱 신비롭다. 노고단은 해발 1507m로 중국 태산과 같이 제단을 만들어 산신제를 지내던 영봉(靈峯)이다. 우리 일행은 우리 곁을 먼저 떠난 세 산(山) 친구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올렸다.

이튿날 1500년 된 고찰 화엄사를 찾았다. 무엇보다 경내에 있는 불언(不言) · 불문(不聞) · 불견(不見)을 형상화한 석불(石佛)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법구경에 있는 말로 각각 험한 말은 필경 나에게 돌아오니 하지 말라, 산 위 큰 바위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 지혜로운 사람은 비방과 칭찬에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남의 잘못을 보려 말고 항상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옳고 그름을 살펴야 한다는 의미라 한다. 이번 여행에서 얻은 귀한 경구(警句)다.

두 번째 들린 곳은 운조루(雲鳥樓) 고택이다. 운조루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운조루에는 우리가 가슴에 담아 둬야할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타인능해(他人能解)가 새겨진 큰 쌀독이다. 누구든 이 쌀독을 열 수 있다는 뜻이다.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들에게 이 쌀독에 든 쌀을 가져가게 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낮은 굴뚝이다. 운조루에는 높이 쌓아 올린 굴뚝이 없다. 운조루 굴뚝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눈에 잘 띄지 않게 숨어 있다. 굴뚝이 높아야 연기가 잘 빠진다는 걸 이 집을 지은 주인이나 장인이 모를 리 없었다. 다만 밥 짓는 연기가 멀리 퍼지는 것을 막고자 함이었다.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이 이 집의 굴뚝 연기를 보면서 더욱 배고픔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라 하니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대단했음을 새삼 느꼈다. 1박2일 짧았지만 배움 가득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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