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사 이화보살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인간 세상에서 죽어 신의 세상에 다시 태어나다

수정사 이화보살

 

인생은 ‘삶’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라는 말이 있듯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결정된다. 결국 ‘어떤 선택’으로 살아갈 희망을 얻게 되는데, 사람들은 그 ‘어떤 선택’이 두려워 오랫동안 삶의 바깥에서 서성댄다. 아니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 선택만큼은 하지 않겠다고 한다. 지금 무속인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이화보살의 삶도 그랬다. 무속인의 삶을 선택하지 않기 위해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선생님을 만나 비로소 자신의 길에 들어선 행복을 맞이했다. 죽음 앞에서 자신의 길을 찾은 이화보살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죽음 앞에서 빛을 선사한 생명의 은인 시어머니

이화보살이 부산에 자리 잡은 수정사는 넓은 법당 안에 환희의 빛이 찬란하다. 2년 전 무속인의 길에 접어든 이화보살은 3개월 전 수정사로 법당을 옮겼다. 스승으로 모시는 선생님 그녀의 됨됨이를 보고 법당을 만들어 준 것이다.선생님은 이화보살이 길을 잃고 헤맬 때 진정한 자신을 알아보고는 바다보다 더 큰 마음으로 안아주고, 보듬어 주었다.

“5세부터 경기로 넘어갈 만큼 많이 아팠던 나를 데리고 어머니는 보살집도 많이 다니셨다. 그 때마다 보살들은 나에게 무속인의 길을 가야 한다고 했다. 사실은 할머니가 신줄을 갖고 사찰을 운영하셨는데, 대물림을 해야 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머리가 너무 아프고, 자꾸 뭔가가 보여서 학교를 다닐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6개월 동안 결석을 하기도 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신의 증후가 나타났다. 산에만 가면 허공에 어떤 실체가 떠다니는 것이 보였고, 나무를 보면 오르고 싶었다.”

그렇게 신병을 달고 살았지만, 그녀는 죽어도 무속인의 길은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무병(巫病)이라고도 하는 신병은 성별·신분·가계·연령 등에 상관없이 갑자기 원인 모르게 앓기 시작한다. 의술의 효험을 전혀 보지 못하고, 음식을 먹지 못하거나 불면증으로 고생하다가 꿈이 많아지고 이해할 수 없는 환영에 끌려 다니는 정신착란에 빠지기도 한다. 육신에 고통이 있거나, 더는 남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야 신을 따르기에 신은 육신과 금전, 그리고 가장 아끼는 사람들에게 해를 가한다.

 

신의 세상에 다시 태어나다

20세부터 무병을 앓았던 이화보살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늘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팠고, 귀신이 보이니까 사람들과 대화도안 됐다. 신의 길을 가지 않기 위해 두 번이나 자살 시도를 하고, 교회, 절, 성당 등을 다녔던 이화보살은 10년 동안 절에서 공을 들이면 안 아프게 해 주겠다는 스님의 말을 듣고 절에도 갔다고 한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통증은 지속됐고, 그녀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빨이 아프면서 안과에서 치료를 받았고, 그 사이 이빨이 다 썩어 가는 줄도 몰랐다는. 10년 후 모든 것이 망가진 자신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자살을 결심했다.

 

다행이 결혼을 했는데, 결혼생활도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정비공장을 크게 했던 남편이 1년 만에 몇 십억의 손해를 보자 지병을 얻게 되었다. 신장병을 앓던 남편은 투석까지 하게 되었고, 먹고 살기 어려운 형편에 병원비를 마련할 길도 막막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죽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아픈 사람을 두고 혼자 죽을 수가 없었던 그녀는 남편이랑 죽자고 했다. 죽을 마음으로 2015년 부처님 오신 날,선생님 있는 법당으로 갔다. 법당에 등이나 하나 달고 죽겠다는 마음으로 등을 하나 달고 나오는데 시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께서 죽으려고 했던 내 마음을 어떻게 아셨는지, 죽겠다는 마음으로 한 번 가보자고 하셨다. 그러면서 인간으로는 죽어라, 대신 신의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 보자, 라고 하시더라. 그 말씀을 듣고 순응을 했다. 지금은 행복하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2015년 신의 길을 걷게 된 그녀는 처음에는 양산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신 선생님이 몇개월 전, 부산에 ‘수정사’란 법당을 차려 그녀에게 운영하라 했다. 신제자를 안 내겠다는 철칙을 세우고 신의 길에 들어 왔다는 선생님 이화 보살 포함해서 세 사람의 제자를 배출했다. 몸이 아픈 사람, 집안에 줄초상이 난 사람, 더 이상 갈 길이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선생은 차마 그냥 보고 넘어 갈 수가 없었다. 처지가 딱한 사람을 보고 절대 그냥 넘어 가는 법이 없는 선생님은 일반인들에게 점사를 봐주지 않는다고 한다. 없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너무 당연한 일로 생각하는 반면, 그 당연한 일들이 너무 많아서 자신이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속인의 길을 가는데 도움을 주는 데에도 시어머니 철칙이 있다고 한다. 첫 째는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고, 심신이 고운 사람들이다. 선생이 이화보살에게 대가 없는 선행을 베푼 것 또한 ‘베푸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선생님을본 이화보살은 베푸는 힘이 좋은 사람, 욕심 없는 사람,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은 사람, 보살심이 큰 사람, 착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안타까워 도움을 주게 된 것이라고.

 

‘굿’에는 어떤 움직이는 기운 반드시 있어

이화보살은 무속인들은 신과 인간의 촉매 역할을 하면서 인간을 돕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보통 힘이 든 사람들이 의뢰를 했을 때, 70%는 인간의 노력으로 해야 하지만, 30%는 부족한 기운으로 채울 수 있다고 한다. 보통 사업이나 가정이 어려운 사람들, 또는 지병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도움을 받는다. 이화보살과 선생님‘굿’에는 어떤 움직이는 기운이 반듯이 있다고 한다.

“양산에서 몸이 아파 오셨던 어떤 여자 분 같은 경우 우리 법당을 찾아 정성을 들이고는 병을 고쳤다. 막내 조카의 경우 양산대 병원에서 희귀병 판정을 받고, 모두가 충격에 휩싸여 있을 때, 내가 굿을 하면서 ‘오진으로 돌려 주세요!’하면서 빌었다. 그런데 재검을 받았는데 진짜 오진으로 나왔다. 부산에서 황태국집을 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월세도 못 줄 만큼 힘이 들어 했다. 죽을 거 같다던 그 사람을 위해 선생님께서 과일값만 받고 굿을 해 주셨다. 문을 닫아야 하는 사람이었는데, 얼마 후 방송국에서 맛집이라고 찾아 왔단다. 그런 후 하루에 200~3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단다.”

이렇듯 이화보살은 선생님 자신에게 그랬듯, 사람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길을 찾아 갈 수 있도록 안내한다. 아울러 삶이 답답한 사람들이게 빛과 소금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무속인으로서의 소명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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