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세기 한강하구 길목에 위치한 포구들 재조명 통해 문화자산 만든다

【기동취재본부=ndnnews】안홍필 기자 = 김포시 서쪽은 강화도 사이에 염하와 북쪽과 동쪽은 한강하구와 접하고 남쪽은 아라뱃 길이 조성되며 김포시는 도심 속에 섬이 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김포를 감싸고 있는 물길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한양의 경창과 조운선들을 비롯하여 많은 배들이 오고 가는 중요한 뱃길이기도 했다. 김포의 11개 포구 외에 일제강점기 시기의 기록을 보면 포구들이 더 많이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지금은 사라져 찾아볼 수 없으나 불과 100여년 전만해도 주민들의 삶이 녹아있었던 포구였다.

 

그러나 1950년 전쟁 이후 군사분계선으로 인해 배들이 오갈 수 없는 상태로 많은 뱃길과 배들이 정박했던 김포를 대표하던 포구들이 사라지거나 명칭만을 이어내려 오고 있다.
김포문화재단은 김포의 해안선을 따라 활발히 조성됐으나 잊혀져가는 옛 포구 11곳에 대해 지리적 위치와 역사, 문화적 가치 등을 찾기에 한강하구의 중심도시 김포시가 나섰다.

김포시에 위치한 11개 포구는 섶골나루, 감암나루, 운양나루, 전류정나루(전류리포구), 마근포, 조강포, 강령포, 갑곶나루, 원머루나루, 신덕포나루, 대명나루로 제일 활발하게 번성했던 김포를 대표하는 나룻 터라 할 수 있다.

“나루와 포”를 살펴보면 ‘나루’는 국어사전에 강이나 내, 좁은 바닷목에서 배가 건너다니는 일정한곳으로 사전적 어의로 ‘진(津)은 나루’를 일컫는 명사고 ‘도(渡)는 건너다’라는 뜻의 동사다. 나루는 단순한 도하지점이 아닌 하천에 의해 일시적으로 끊어진 길을 연결하는 접합점이라 볼 수 있다. 나루의 중요한 기능은 수운과 육운에 의해 운반된 물화가 교역되는 거점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도진(渡津)으로 표기되어 있다.
‘포(浦)는 우리말의 개’에 해당해 한자사전에 ‘강이나 내에 조수가 드나드는 곳(개펄)’을 가리킨다. 개흙이 퇴적되는 해안이나 하구, 조류의 영향을 받는 하천의 하류지역에 주로 분포하며, 조수(潮水)의 진퇴에 따라 선박의 출입과 정박이 용이해 일찍부터 포구로 이용되었다. ‘포구(浦口)’란 배가 드나드는 어귀, 즉 작은 항구를 의미한다. 포는 진(津)의 의미까지 함유해 하천연안에는 진(津) 지명이 많다. 조선지지자료에는 포(浦)로 표기되어 있다.

 

김포는 고지도 중에 지형과 주변의 수운관계를 파악해 보면 조운과 관련된 길과 각 도시 간에 육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포지뎍의 포구를 가장 잘 표시한 지도가 1696년 제작된 ‘강화지도’다. 강화지도에 염하와 접한 대곶면 일대의 포구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으며 대곶면 일대에 표시된 포구는 ‘호포’(好浦), 고양리에 있는 원모루나루의 다른 표현인 ‘고양포’(高陽浦), 현재 송마리로 추정되는 ‘성포’(成浦)와 ‘마당포’(馬堂浦), 신안리에 위치한 ‘신덕포’(新德浦) 등이다. 이들 포구 중 고양포와 신덕포는 아직도 명맥을 유지 어업활동을 이어 나아가고 있다.

 

옛 김포의 포구에 대해 기억을 하고 있는 관내 어르신들을 방문 면담과 옛 지도를 바탕으로 하여 명칭과 위치를 파악해 11곳 포구에 대한 근거를 마련했으며 철도가 놓이기 전 가장 중요한 교통로는 뱃길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예부터 김포의 포구는 중요한 수운의 이동로서 역할을 수행하며 발달했다.
이에 김포문화재단은 김포시의 역사.문화와 관광인프라 조성을 위한 포구의 재조명을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모색한 “김포의 미래, 포구에서 읽다”란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활동 중에 있어 김포의 역사문화자원으로서 미래가치 창출로 이어질지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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