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최대의 화제작인 영화 <설국열차>에 나오는 인물들의 행적은 마카로니웨스턴의 주인공처럼 선악의 구분이 모호합니다. 주인공 커티스(크리스 에반스)가 민중을 이끈 공익적 행위는 사적인 트라우마(꼬리칸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살육)와 잇닿아 있었죠. 우여곡절 끝에 엔진칸에 진입한 커티스가 수괴(首魁) 윌포드(에드 해리스)로부터 전해들은 실상은 놀라운 것이었어요. 자발적인 형태의 반란도 수요와 공급 측면에서 생존을 담보로 한 고도의 유인책이었다는 것이었지요. 커티스는 애써 지탱해온 가치의 정당성이 훼손됨에 괴로워하다 자멸합니다. 게다가 신적 지도자인 성인 길리엄(존 허트)도 윌포드와 한통속이었다는 불편한 진실도 더해집니다.

 관객의 혼란을 더욱 부추기는 것은 영화 마지막 시퀀스의 ‘열린 결말’이에요. 파괴되어 탈선한 기차를 헤집고 두 사람의 생존자가 어렵사리 빠져나옵니다. 동양소녀 요나(고아성)와 흑인 아이죠. 털옷은 그나마 갖춰 입었지만 배낭은커녕 소지품도 없군요. 맞은 편 설원에 백곰이 나타나 또 다른 인류의 조상이 될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이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영화는 끝났지만 고개를 흔들며 극장 문을 나서는 관객의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빙하기의 내습으로 모든 생명이 멸절되었으리라 여겨지는 동토(凍土)에 돌연 짐승이 출현하였으니 좋은 징조가 아닐까? 봉준호 감독은 고심하다 긍정적인 결말을 염두에 두고 희미한 희망을 내비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건너편 구릉에 나타난 흰곰이 두 사람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던 듯도 싶군요. 한 종(種)의 무지함이 다른 개체의 무지함에 건네는, 콜라 선전에서 보았음직한 천진하고 친근한 미소를.

 열린 결말이란 관객의 상상에 의존하는 것이니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에요. 하지만 신인류의 장래에 대한 일말의 불안이 가시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한국인 보안기술자와 열차를 탈출했다가 얼어 죽은 이누이트 족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소녀 요나와 흑인 아이는 열차에서 태어난 ‘트레인 베이비’들이죠. 이들은 외부의 상황에 대해 무지하여 ‘흙’이 무엇인지도 몰랐어요. 그런 존재들이 자연 상태에서 야성의 위험(백곰)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군요.

 새로운 아담과 이브일지도 모를 두 사람을 동양계 소녀와 흑인 아이로 설정한 것은 감독의 작은 노림수(마이너리티에 대한 배려)일 테지만, 그들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투척된’ 환경은 어떤가요? 몇 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이 터를 잡은 에덴동산을 떠올려봅니다. 중동지역 어디쯤일 거라고 짐작되는 이곳은 노숙이 가능하고 무화과 잎사귀로 옷을 대신할 정도로 기후는 온난했으며 사과 같은 일용할 양식 또한 풍부했어요. 그런데 영화 속 두 생존자는 빙하기 설원에 버려져 있단 말이에요. 털옷을 걸쳤을 뿐 특별한 물자나 장비도 없는 것 같군요. 그들의 앞길이 순탄치 않아 보이는 것이 지나친 기우일까요?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에서 디스토피아적 결말을 떠올리는 것은 무엇보다 살아남은 두 캐릭터가 시사하는 함의 때문입니다. 요나는 앞을 내다보는 능력을 지녔고 흑인 아이는 엔진룸에서 알바를 뛴 전력이 있군요. 예지력을 갖춘 신기(神氣)의 소녀는 샤먼, 주술, 신탁, 정신, 종교, 감성을 상징합니다. 엔진의 부속 역할을 한 아이는 기계, 기술, 물질, 과학, 이성과 끈이 닿아 있고요. 요나와 흑인 아이는 범주가 다른 이항대립의 관계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양자의 관계는 살가운 편이 아니었어요. 그들이 같은 배를 타고 있단 말이죠. 혹 요나는 인류의 또 다른 파멸을 앞당겨 보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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