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노래가사처럼 이 가을엔 누구에게라도 편지를 쓰고 싶어집니다. 다 늦게 헤어진 옛 사랑이 생각난 것은 아닙니다. 오곡백과 거둬들이는 이 풍성한 수확의 계절에 왜 느닷없이 마음속엔 텅 빈 듯 허전한 생각이 드는 것인지. 산천은 꽃피는 봄보다 더욱 아름다운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가는데 왜 가슴 속엔 이렇게 서늘한 바람이 감도는 것인지. 파란 하늘 높이 떠도는 새털구름을 보아도, 바람에 휘날리는 억새의 춤을 보아도 공연히 찔끔 눈물이 날 것 같은 이 처연한 심사는 무슨 까닭인지. 누구에게 특별히 홀대받거나 구박받은 일도 없건만 공연히 절로 서러워지는 이 궁상은 또 무슨 까닭인지.

그래서 불현듯 그 누군가와 한적한 벤치에 나란히 앉아 서로를 위로하고 위로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빠, 생일 축하 드려요!”

알림 소리와 함께 휴대전화로 종이 편지를 대신해 날아온 짤막한 문자 메시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누이동생입니다. 가난한 대학생 시절 먼저 시집가는 동생에게 값싼 화병 하나 달랑 안겨 준, 그 이후로도 무얼 한 번 제대로 베푼 적 없는 오라비에게 그래도 잊지 않고 인사를 차리는 데 그저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철없던 시절 심심풀이처럼 늘 먼저 건드려 울려 놓고선 어머니에게 징징거린다 야단맞게 했던 누이. 어머니는 홀로 먼 길 떠나시고 누이가 어느덧 손자손녀를 둔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이제야 철이 드는 걸까요. 다 늦게 한 번도 다정한 오빠 구실을 못했던 젊은 날이 후회스러워집니다. 와락 보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우리 가끔씩 중간쯤에서 만나면 어떨까?”
“그럼 좋지요. 무슨 일이 있어야만 볼 수 있으니 항상 그립네요.”

그렇게 어머니가 떠나신 후 형제 셋, 자매 둘, 다섯 남매의 정기적인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명절 때의 의례적인 모임, 예전 처남 매부가 어울려 벌이던 술판과는 판이한 분위기입니다. 낙엽 흩어지는 호숫가를 거닐다 우연히 마주친 여인과의 가슴 설레는 만남과도 물론 전혀 다른 분위기입니다. 마주 앉은 얼굴에 그려진 나이테를 세어 보고, 마주 잡은 손의 온기를 느끼면서 말이 없어도 서로의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호숫가에서 기다렸을 그 여인은 이제쯤 떠났을까요. 아마도 나이 덕이겠지요. 젊은 날 광풍에 휩싸여 방황하던 영혼이 마침내 어머니 품속처럼 안온한 동기(同氣)의 울타리 속에 안착한 느낍입니다.

자진해서 연락책이라는 작은 짐 하나를 짊어졌습니다. 짐을 지는 마음이 늘 이렇게 가볍고 기쁜 것이라면 무슨 짐인들 마다하겠습니까. 그러나 한가족 안에서도 뒤얽힌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는 숙제, 짊어지려 해도 지어지지 않는 짐도 있어 마음만 무겁습니다.

“어떠한 연줄로 부모와 자식이 되었는지, 어떠한 인연으로 삼촌과 조카가 되었는지, 자문해 보지만 미치지 못한 생각은 잡히지 않는 광활한 사고의 영역 언저리를 맴돌 뿐입니다.”

오래전 힘겨운 병영 생활 도중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리며 보내온 조카의 편지가 이 가을 제 가슴을 아프게 파고 듭니다. 어린 나이에도 사려 깊고 입이 무거워 늘 조심스럽던 조카. 서랍 속에 간직해 둔 편지와는 달리 지금 조카는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제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먼 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린 마음에 담고 있었을 고뇌 따윈 헤아리지도 않고 무책임하게 내뱉았던 힐책이 이렇게 못이 되어 제 가슴에 박힐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누이처럼 조카와도 보고 싶다는 문자를 손쉽게 주고받게 된다면 저 푸른 하늘로 솟아오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누구에겐가 상처를 주고 폐를 끼치곤 합니다. 그런데 생각나는 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당한 섭섭한 일, 억울한 일들뿐입니다. 늘 저만 옳은 것 같지만 남의 눈에 든 티를 보면서 제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미욱함 탓입니다. 이런 후회조차 모두 때 늦은 것이니 더욱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가을엔 저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저질렀을 모든 잘못에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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