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568돌 한글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제게 한글날은 시나브로 '한글의 기일'처럼 다가옵니다.

그것도 모자라 해마다 ‘부관참시’를 당하는 것 같은 모욕감과 수치감, 참람함과 황망함, 민망함과 자괴감에 고개를 떨구게 합니다.

한글날을 맞아 한 포털 사이트가 대학생 617명을 대상으로 맞춤법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가 아주 ‘충격적’으로 나왔다고 하지요.

"감기 빨리 낳으세요. 어의가 없어요. 얼마 전에 들은 예기가 있는데요. 저한테 일해라절해라 하지 마세요. 이 정도면 문안하죠. 구지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설앞장이 안 열려요. 무리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사실 충격을 넘어 ‘아연실색’할 노릇이지만 그나마 ‘충격씩이나’ 받았다니 다행입니다. 잘못 쓴 것 정도는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기왕 ‘충격받은’ 김에 학생들에게 하나 더 묻겠습니다. 이건 어떤가요?

“라떼 나오셨습니다. 화장실은 저쪽으로 돌아가시면 계세요. 5천원 받으셨구요. 그 색상은 지금 없으세요. 품절되셨어요. 매진이세요. 이만하면 착한 가격 아니신가요? 좋은 지적이십니다. ”

 

뭐가 문제냐구요? 문제가 뭔지도 모른다는 게 여간 문제가 아니지만 앞서 받은 ‘충격’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한 걸로 마음 접겠습니다. 바로잡아 주는 것에도 지쳐서 이제 저는 이런 말 들을 때마다 '확' 때려주고 싶은 걸 매번 참느라 명이 갉아 먹히듯 힘겨우니까요. 어차피 기대도 안 하면서 말입니다.

지난 7일자 본 칼럼그룹의 고영회 님의 글 <한글날을 앞둔 우리 ‘말글살이’ 모습>에 한 독자가 이런 덧글을 올렸더군요.

일부 학자들이 "생각이 디퍼런스하니까 컬춰가 액티브하게 발달하지 못하고, 펀드가 조성이 안되어 릴렉스한 행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콘테이너블하게 집적하여 아카이브를 형성하자.”는 따위로 말을 하는데 이런 류의 병을 ‘지식 암’이라고 부르면 어떻겠습니까?

무릎을 탁 칠 정도로 ‘딱’인 표현이라며 글쓴이도 저도 공감을 했습니다. ‘지적 허영병’이 깊고 깊어지니 급기야 ‘암’으로 발전될 밖에요. 하기야 ‘암에 걸리셔도, 병이 있으셔도’ ‘저희 나라’는 보험을 들어 주시니까요.

뿐만 아니라 SNS(소셜네트워크 서비스)로 인해 활판을 바꾸는 것이 번거로워 정확한 맞춤법 ("잘 있었니?" 할 것을 "잘 잇엇니?" 하는 식)이나 조사를 명확히 쓰는 법, 완전한 문장을 구사하는 자체가 귀찮아지니, 우리 세대야 알고 안 한다 쳐도 다음 세대는 몰라서 못할 테니 이것이 곧 '한글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요?

애 어른 할 것 없이 스마트 폰에 매달려 글 한 줄,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고, 거리의 간판도, 잡지의 표제도, 물건의 이름도 영어 일색이니 영어를 모르면 자칫 생리적 일도 처리할 수 없는 나라에서, 매해 돌아오는 '한글 생일'이 ‘한글 제삿날’인 것 같은 끔찍하고 처참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 말이 지나치게 자조적이고 비아냥으로 들리나요? 당장 경험해 보시면 수긍하실 겁니다.
얼마 전 명동 L 백화점의 드넓은 여성복 매장에서 발견한 유일한 한글은 ‘Rest Room’ 밑에 아주 작게 쓰여 있는 ‘화장실’이었으니 그게 그렇게 반갑고 고마웠을 정도였으니까요.

말은 그저 소통의 도구가 아닐진대, 그나마 소통도 안 되고 있으니 분통 터집니다. 영어권에서 20년 넘게 살다 온 저도 서울 시내를 사전 찾아 가며 다니고 있는 지경이니 말 다한 것 아닌가요? 한마디로 영어에 미친 나라입니다.

언어는 지식과 지혜를 익히게 하고 나의 자아를 확장하며 내 지평을 넓혀 나를 성찰하게 하는, 나와 함께 태어나 나와 함께 자라고 나와 함께 소멸하는 나의 ‘살이’입니다.

언어를 통해 내가 표현되며 자의식이 형성됩니다. 나의 자의식이 이웃과의 진정한 소통을 만들어 냅니다. 정중하고 진지하며, 예리하면서도 진솔하고, 정서적으로 풍요롭고 다감한 인품은 ‘언어가 빚은 연금술'입니다.

나의 말은 곧 나이며, 그의 말은 곧 그입니다. 우리의 말은 곧 우리입니다.
한글을 돌아보는 것은 곧 우리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필자소개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7월, 호주로 떠났다. 시드니에서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으로 일하다 2013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와 자유기고가,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중앙일보, 여성중앙, 과학과 기술 등에 에세이를 연재하며, KBS 라디오에 출연 중이다.    
낸 책으로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고, 2013년 봄에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를 출간했다.
블로그http://blog.naver.com/shina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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