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버린 소쇄(瀟灑)한 초겨울, 친구들과 남도 여러 곳을 다녀왔다. 그중 전북 고창(高敞)에서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당초 흑산도, 홍도를 다녀오려 했는데 갑작스러운 기상악화로 행선지를 바꿨기 때문이다.

신재효(1812~1884)는 200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판소리의 오늘이 있게 한 인물이다. 그는 당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판소리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가의 사설(辭說)을 집대성하였다. 이 여섯 마당 이외에도 20여 편의 단가(短歌), 잡가(雜歌), 가사(歌辭)를 창작했다. 뿐만 아니라 동리는 판소리 이론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광대가 갖춰야 할 조건으로 인물, 사설(우아한 표현), 득음(得音, 음악적 기교), 너름새(몸짓)를 들었고 이를 판소리의 4대 법례(法例)라 칭했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 연못, 정자가 있었던 약 4천 평 규모의 동리정사(桐里精舍)는 50여 가구가 함께 숙식을 하면서 판소리를 교육, 수련, 공연, 평가하는 판소리 생활문화공동체였다. 동리정사에는 한 시대를 풍미하던 광대들과 전국에서 소리를 배우고자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 최초의 판소리 수련원이었던 것이다.

판소리는 판과 소리로 구성된 것이다. 판은 굿판, 씨름판, 노름판에서 보듯 어떤 일이 일어난 자리라는 뜻이다. 다수의 행위자가 동일한 목적을 위해 필요한 과정을 수행하여 어우러지는 자리 또는 행위를 일컫는다. 소리는 인간의 목소리 곧 노래를 뜻한다. 즉, 판소리는 부채를 들고 창(노래), 아니리(말), 발림(가벼운 몸짓, 팔짓)으로 한 사람의 소리꾼이 광대, 고수(鼓手), 관중과 함께 판을 짜나가는 공연예술이다.

신재효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진채선(陳彩仙)이다. 그녀는 신재효의 도움과 소리 선생이었던 김세종의 지도를 받아 판소리계의 군계일학이었다. 미려하면서도 웅장한 그녀의 성음과 다양한 기량은 관객을 사로잡곤 했다 한다. 신재효는 고종 4년(1867년) 경복궁 경회루 중건 축하 낙성연(落成宴)에 진채선을 보냈다. 그 자리에서 남장(男裝)을 하고 방아타령을 불러 하객을 놀라게 했던 채선은 대원군의 눈에 들어 그의 대령기생이 되었다.

신재효는 곧 돌아올 줄 알았던 진채선이 끝내 돌아오지 않자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고, 외로움은 그리움으로 변해 그 정을 도리화가(桃李花歌)라는 노래로 엮어 채선에게 보냈다. 그간 몇 번이나 상처(喪妻)를 했던 신재효는 여제자에게 각별한 애정을 느꼈던 것이다. 신재효의 나이 쉰아홉이었고 채선이 스물네 살 때 일이었다.

정작 신재효 자신은 소리꾼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경기도 고양 사람으로 고창에 내려와 관약방(官藥房)을 하여 큰 재산을 모았다. 이러한 재력은 그가 판소리계에 큰 공헌을 하게 된 밑바탕이 되었다. 진채선의 경회루 공연 후 그는 그 공로로 당상관(堂上官)에 준하는 명예직을 하사 받았다. 이를 계기로 대원군 정권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판소리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가 64세 때인 1876년(고종 13년) 대흉작으로 굶주리는 사람이 많아지자 자신의 재산으로 이들을 구제하기도 했다.

동리 신재효는 진채선이라는 최초의 여류 명창을 탄생시킴으로써 당시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판소리계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 그는 성(性)이 아닌 실력으로 인정받는 남녀평등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다. 또 신재효는 신분 상승을 꾀하면서도 당시 주류였던 한시(漢詩)가 아닌 판소리에서 정신세계를 찾았고 이를 즐겼을 뿐만 아니라 전승하기 위한 교육에 일신을 바쳤다. 평범한 아전(衙前) 출신으로 판소리에 대한 높은 안목과 예술혼으로 판소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신재효는 진정 이시대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선구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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