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본부/ndnnews】안홍필 기자= 왕징면은 마전군 북면(北面) 지역으로 동막(東幕), 중동(中洞), 애동(艾洞), 징파(澄波), 노동(蘆洞), 무등(無等)의 6개리를 관할했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기존의 6개리를 동막, 중동, 애동, 노동, 징파, 무등, 외곡(外谷), 유림장(楡林場)리 등 8개리로 개편하였으며, 장단도호부 강동면(江東面) 지역의 고잔(高棧), 기곡(基谷), 산점(山店)의 3개리를 기곡.기석(基石), 산점.고왕(高旺), 고잔상.중.하리로 개편하고 강동면을 강신면(江新面)이라 개칭하여 마전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전군이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북면의 8개리를 무등, 북삼(北三), 노동, 동중(東中)의 4개리로 강신면의 7개리를 기곡, 고왕, 고잔상, 고잔하 4개리로 축소 병합하였고, 연천군 서면(西面) 지역이었던 계명(鷄鳴), 군영(軍營), 영정(永貞), 안월(安月), 소포(少浦), 야전(野前)의 6개리를 강서(江西), 강내(江內) 2개리로 개편하여 편입시켰으며, 마전군 서면지역이던 작동리(鵲洞里)를 편입시켜 왕징면이라 칭하고 총 11개리를 관할했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동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과거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현재는 18개리의 법정리를 두고 있다. 이중 무등, 동중, 노동, 북삼 4개리에만 주민이 입주해 있으며, 그 외 미 입주지구인 14개 법정리 중 강서, 강내, 작동 등 3개리는 출입영농만 가능한 지역이며, 18개 법정리는 군사분계선과 인접한 완충지대 및 북한지역에 속해 있다. 면의 중앙에 고왕산을 비롯하여 대체로 산지가 많다. 북쪽에서 동쪽으로 계속 이어지는 임진강이 면계를 형성하며, 안월천, 노동천 유역에 평지와 함께 취락이 분포한다. 전체면적 중 농경지 면적은 협소한 편이며,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많다.

왕징면을 구성하는 마을 명칭의 유례

- 무등리 : 마전군 북면지역으로 무등실이란 골짜기가 있어 무등리라 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페합에 따라 유림장리(楡林場里)를 병합하여 왕징면에 편입되었다. 한국전쟁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면서 민간인 입주가 허용되었으며, 현재는 왕징면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 1개의 행정리, 8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 노동리 : 마전군 북면지역으로 목은 이색(李穡)의 5새손 이명흔이 지금의 노동리에 정착하고 보니 갈대가 우거져 있어 ‘갈울’이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한국전쟁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 공포에 의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3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 동중리 : 마전군 북면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막리와 중동리를 병합하고 ‘동중리’라 하여 연천군에 편입시켰다. 1945년 해방이후 38선 이북에 놓여 있다가 한국전 이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 공포에 의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5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 북삼리 : 마전군 북면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외곡리, 징파리, 애동리 등 북쪽8개리를 병합하고 ‘북삼리’라 하여 왕징면에 편입시켰다. 1945년 해방이후 38선 이북에 놓여 있다가 한국전 이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 공포에 의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민통선 지역에 놓여 있어 일부지역에만 민간인이 입주해 있다. 현재 1개의 행정리, 8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 강서리 : 연천군 서면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계명리, 군영리, 영정리를 병합하고 ‘강서리’라 하여 왕징면에 편입시켰다. 1945년 해방이후 38선 이북에 놓여 있다가 한국전 이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 공포에 의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휴전선과 인접한 민통선지역으로 현재 민간인이 살고 있지 않고 출입 영농인만이 가능한 지역이다.

- 강내리 : 연천군 서면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안월리, 소포리, 야전리를 병합하여 연강(임진강의 또 다른 옛 이름)의 안쪽이 되므로 ‘강내리’라 하여 왕징면에 편입시켰다. 1945년 해방이후 38선 이북에 놓여 있다가 한국전 이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 공포에 의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휴전선과 인접한 민통선지역으로 현재 민간인이 살고 있지 않고 출입 영농인만이 가능한 지역이다.

- 작동리 : 마전군 서면지역으로 까치와 닮은 형상의 산이 있어 ‘까치울’ 또는 ‘작동’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왕징면에 편입되었다. 1945년 해방이후 38선 이북에 놓여 있다가 한국전 이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 공포에 의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휴전선과 인접한 민통선지역으로 현재 민간인이 살고 있지 않고 출입 영농인만이 가능한 지역이다.

마을의 옛 명소

- 스무스장거리 주막(峨嵋山秋月) : 왕징면 무등리 면사무소가 소재한 곳. 옛 마전군의 빼어난 풍광을 ‘지산팔경’이라 칭하고 시를 읊은 팔경 중의 한 곳이다.

- 스무스장거리 : 화이트교 서쪽에 있는 큰 마을 마전군 당시 임진강 옆 언덕에 스무스나무 숲이 무성히 우거져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진상리로 건너다니던 뱃터거리를 ‘스무소나루’, 스무소 위에 있는 임진강 여울을 ‘스무여울’이라 했다. 3.8일이 되면 큰 장이 형성되어 ‘스무스장거리’라 불리어 졌다.

- 스무소 나루 : 북삼리에서 남쪽으로 강을 따라 내려오면 왕징면 무등리이다. 이곳 무등리에 스무스나무 숲과 큰 연못이 있어서, 그 주변 나루를 ‘스무소나루(楡淵津)’ 또는 ‘스무수나루’라고 했다. 스무소나루는 뱃길이 발달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서해안에서 임진강으로 올라 온 상인들과 함경도 보부상들을 중심으로 거래가 성행했던 곳이기도 하다. 서울 마포에서 올라온 소금과 고등어, 강원도 이천 지방의 잡곡이 주로 거래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작은 배를 갈아타고 지금은 북한 땅이 된 강원도 안협까지 갔으며, 물이 없을 땐 사람 이 배를 끌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 용궁정 : 농바위 옆. 임진강 옆에 있는 깊은 소, 군자산 정상에 있던 우물에서 홍두깨를 넣으면 이 소로 떠올랐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 오는 곳이다.

- 조개못 : 스무스 마을 북쪽. 임진강 옆에 있는 큰 못. 민물조개가 많이 서식하는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현재 주변에 관광 활성화를 위한 공원화사업으로 인하여 일부분을 복원했다.

- 도깨비여울 : 조개못 옆에 있는 임진강 여울. 도깨비가 자주 나타난다하여 붙여진 여울이다.

- 화이트교.무등교 : 군남면 진상리와 연결해 주던 임진강 다리로 한국전쟁 당시 전곡리를 탈환하고 개성방향으로 진격하던 국군과 유엔군이 이곳 임진강에 당도해 보니 인력과 장비가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없어 도하작전이 지연되자 당시 미군 공병대대의 장교인 화이트(White) 소령이 나무를 급조하여 놓은 나무다리라 하여 화이트교라 칭하여 지금까지 불리우고 있다. 다리는 통나무 교각에 나무판자를 깐 좁은 노폭이었으나, 1970년 잠수교 형태의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하여 사용하다가 임진교가 새로 건립되어 현재는 화이트교가 사라지고 임진강에 놓여 있던 흔적만이 남아 있다.

- 살포장 : 장구산 뒤에 있는 산. 능선 위로 솟은 두 개의 봉우리가 솔포를 친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또한, 예전에는 이곳에 봉수대가 있어 북쪽의 고왕산, 남쪽의 금굴산 봉수대와의 교신역할을 수행하던 곳이다.

- 배미골 : 용호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부터 물이 흔하여 논이 많아 논의 단위인 한 배미, 두 배미의 뜻을 따 배미골로 불리게 되었다. 고려시대 때에 마을이 있던 곳이며, 지금도 그때 쓰였다는 자라우물이 남아 있으며, 1973년 8월 5일 골짜기에서 고려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은 바 있다.

- 벙바위 : 징파나루 남쪽, 임진강 옆에 있는 큰 바위 예전에 부엉이가 많이 서식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고양이 모습을 하고 있다하여 ‘괭이바위’로도 불려진다.

- 쇠고개 : 안터에서 강내리로 넘어가는 고개. 옛날 이 마을에 장성한 딸과 함께 살던 홀아비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실성한 아비가 딸에게 아내가 되어 달라고 하자, 딸이 아버지에게 머리를 풀고 소처럼 이 고개를 내려오면 청을 들어주겠다고 해 아버지가 이 고개를 올라 소의 흉내를 내며 내려와 보니 딸이 자결한 뒤였다. 그 후로 이 고개를 쇠고개라 불리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 징파나루 : 60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징파나루에는 당시 태조 이성계가 잔치를 벌이던 정자는 사라졌고 정자 옆 느티나무만이 남아 있다. 북삼리와 삼거리를 이어주는 임진강의 큰 나루터. 북삼교를 가설한 이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정약용의 ‘대동수경’에 의하면, 이곳의 강물은 강바닥의 자갈이 훤히 비칠 정도로 빛깔이 맑다하여 징파강이라고 이름지었다 한다.

- 군영장거리.군영리 : 은거당터 서쪽에 있던, 왕징면의 옛 소재지, 조선후기 연천 현감을 역임했던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의 ‘청천집’(靑泉集)에 실려 있는 ‘관허상국은거당국기’(觀許相國恩居堂國記)에는 군사를 주둔시켰던 곳으로 마을 사람들은 군영이라 부른다라고 이곳의 유례를 적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지금은 이 일대 모두가 농경지로 변해 있다.

- 장경대 : 장경석벽 남쪽에 있던 마을. 한국전쟁 전에는 포구가 형성되어 서해안에서 임진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온 새우젓, 소금 배들이 이곳에서 생산되는 곡물.땔나무 등과 물물교환을 하던 장소였다. 또한, 중면 횡산리의 벌말로 건너다니던 장경대나루터에는 주막집이 있어 여행객의 쉼터로 이용되었던 활기찬 강촌이었으나, 지금은 비무장지대 안에 놓여 있다.(빙에여울 윗쪽 현재 강내리)

- 병풍바위 : 장경대 마을 북쪽. “임진강변에 있는 현무암 석벽” 높이 30m 박씨터 입구에서 장경대까지 약 500m 길이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이 석벽의 북쪽 끝으로는 ‘벼락바위’가 있고, 남쪽 끝인 장경대 마을 뒤편에는 큰 바위가 누에처럼 돌출해 있다하여 ‘누에머리’라 불렸다고 한다.

- 이내못 : 놋다리나루 남쪽. 임진강 옆에 있는 길고 수심이 깊은 못. 이곳에 풀어놓은 소를 이무기가 잡아먹고 코뚜레만 남겨 놓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왕징면이 품고 있는 역사, 문화, 지질, 자연경관 속으로 들어가다!... 역사와 문화의 발자취를 찾아서

- 미수 허목 : 조선시대 학문이 높고 뜻함에는 절대 굽힘이 없는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실천했던 큰 선비 미수 허목(眉叟 許穆 1959~1682) 관직에 올라서는 예송논쟁 등을 통해 치열하게 자신의 철학적 정치적 신념을 펼쳐 남인을 대표하는 청남파의 영수로서 붕당정치를 이끌었고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에까지 이르렀다. 그에게 어느 날 살고 있던 초가집에 불이 나 기거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소식을 들은 숙종이 허목에게 집을 지어주라고 명하였으나 수차례에 걸쳐 사양했다. 그러나 끝까지 임금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집을 하사받아 왕께서 은혜로이 내려준 집에서 살아간다는 뜻으로 ‘은거당(恩居堂)’이라 칭하고 살았다고 한다. 현재 그의 발자취는 은거당 터와 그곳에서 100보 거리에 있는 그의 묘소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미수는 연천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첫째는 봄날 산에 꽃이 피고 바위 곁에 새가 우는 것을 보는 것이요, 둘째는 우거진 숲에 해가 저물면 그늘진 벼랑에 짙은 안개가 끼는 것을 보는 것이며, 셋째는 새벽해가 뜰 무렵 첩첩산중에 노을이 어리는 것을 보는 것이며, 넷째는 비오는 날 숲 너머에서 들려오는 개울물 소리를 즐기는 것이며, 다섯째는 비 그친 후 물이 불어난 앞개울에서 낚시를 드리우는 것이며, 여섯째는 시냇가 바람이 비를 몰아올 때 낙조가 산에 어리는 것을 보는 것이며, 일곱째는 저녁 무렵 산기운이 아름다운데 숲 너머에 아스라한 안개가 끼는 것을 보는 것이다. 여덟째는 한밤 모든 동물이 잠 들었을 때 성긴 숲 그림자를 즐기는 것이며, 아홉째는 가을날 협곡에 안개가 어리고 단풍이 천 겹으로 퍼지는 것을 보는 것이며, 열 번째는 '눈이 산 가득 쌓인 산속의 푸른 소나무를 보는 것'이라고 했을 만큼 연천의 자연경관을 높이 평가했다.

- 우화정(羽化亭) : 미수 허목에 이어 소동파 겸재 정선까지 큰 선비가 연천을 품다. 청천 신유한(靑泉 申維翰 1681~1752)은 열악한 환경에 처한 백성을 구휼하는데도 힘썼다. 그가 부임하던 해인 1739년(영조 15) 경기도관찰사 홍경보와 양천현령 겸재 정선까지 세 사람이 삭녕에서 연천의 웅연까지 배를 타고 술과 시와 음악을 나눌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우화정에서 웅연까지 미수 허목이 시와 기행문을 자세히 쓴 명소로 은거당을 내왕하며 발자취를 남긴 지역으로 미수의 바위 글씨가 있는 곳이 웅연이며, 웅연 언덕 위 정자인 취우당에도 그가 우연히 들러 쓴 시가 있다. 하류 쪽의 징파나루는 그가 나들이를 가려면 반드시 지나쳐야 했다고 해서 ‘미수나루’라고 했을 정도. 우화정을 건축한 삭녕군수 이산뢰로 미수의 각별한 제자였으며, 미수의 자취를 찾아다닌 신유한이나 홍경보 모두 남인계 문인이다.

- 북삼리 석조여래입상 : 북삼리 석조여래입상은 광배 상단부분과 두부가 심하게 파손된 상태며 나머지 부분은 양호한 상태, 전체적으로 양감이 떨어지고 저부조로 조각했다. 두부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큰 편이며, 목이 매우 짧아서 마치 얼굴과 어깨가 붙어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고 법의는 통견이다. 입상의 앞에는 지름 90cm의 원형 연화대좌가 배치되어 있는데 대좌 중앙에 턱진 부분에 입상을 올려놓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양식적으로 평면적이고 신체표현이 약간 어색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조여래입상은 본래 현 위치에서 동쪽으로 150m떨어진 민가에 있던 것을 2009년 이곳 나룻터마을로 옮겨져 관리 중에 있다.

- 목은이색영당 : 고려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영정을 모신 영당이다. 목은 선생의 영당이 이곳에 세워진 이유는 목은 선생의 5대손인 청주목사 이명은이 이곳 노동리 일대에 정착하여 한산 이씨 집성촌을 이루게 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처음 영당은 이명은의 6대손 이극빈 등 7형제의 뜻을 모아 1686년(숙종,12)에 목은 선생의 영정을 봉향하게 되었다. 그러다 한국전쟁 중에 전소되어 1974년과 1993년 두 차례에 걸쳐 중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목은은 1328년 가정 이곡의 아들로 태어나 14세 때 성균시(成均試)에 급재 했고, 21세에 원나라에 유학하여 중국문학의 연원을 연구 체득하며 명성이 자자해졌다. 귀국해서는 예문관 대제학, 성균관대사성을 지냈으며, 당시 장군 이성계가 고려의 왕위를 탈취하려하자 이를 저지하려다 역신들의 탄핵으로 수년간 각처로 유배생활을 했다. 정몽주, 길재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사람으로 성리학 발전에 공이 큰 인물로 알려져 있다.

평화가 주는 의미를 찾아서...

DMZ(DeMilitarized Zone)란 1953년 7월 27일 인천시 옹진군을 시작으로 서해안으로 흐르는 임진강 하구에서부터 강원도 고성까지 248km에 남과 북이 휴전협정과 함께 설정된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이 각각 2km를 지정 총 4km의 공간에 군대의 주둔이나 무기를 배치하지 않는 비무장지대를 말한다.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민간인 입주가 허용된 지역을 제외하고는 영농을 위한 농업인만이 출입이 가능하고 나머지 지역은 이북에 속해있는 행정구역상 연천군에 편입되어 있으나, 동족간의 전쟁으로 인하여 10리길밖에 안 되는 지척에 고향을 두고도 부모형제를 만날 수 없는 실향민들의 애환을 간직한 평화구역이지만, 북한의 도발이 종종 일어나는 등 군사협정 위반으로 긴장을 끈을 놓을 수 없는 지구상 유일한 분단선이다.

대표관광지와 트레킹 코스

- 임진강주상절리 : 주상절리는 긴 통모양의 절리를 일컫는 말로 임진강과 한탄강이 합류하는 합수머리(도감포)로부터 북쪽 임진강을 거슬러 오르며 병풍을 쳐 놓은 듯 수km에 걸쳐 수직의 주상절리가 형성되어 있는 독특하면서도 전국에서 유일한 곳이다. 임진강 주상절리는 북한 평강군 오리산 680m 고지에서 분출한 용암이 옛 한탄강의 낮은 대지를 메우며 철원, 포천, 연천 일대에 넓은 용암대지를 형성하며, 임진강을 만나 임진강 상류 쪽으로 역류하면서 현무암층을 만들었다. 화산활동이 끝난 후 용암대지가 강의 침식을 받게 되자 강을 따라 기하학적인 형태의 현무암 주상절리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절리는 암석의 표면이 침식을 받게 되면 이 틈이 벌어지면서 암석이 쪼개어지게 된다. 현무암은 용암이 굳을 때 발생하는 수축작용으로 인해 중심점을 따라 사각 혹은 육각형 모양으로 수직의 절리가 발달하게 되는데, 침식을 받게 되면 육각형 모양의 돌기둥이 떨어져 나가면서 아름다운 주상절리 절벽이 만들어 진다고 알려져 있다.

- 허브빌리지 : 지중해 휴양지를 연상케 하는 연천허브빌리지는 약 17,000평 규모로 임진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향긋한 허브향과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허브마을이다.

- 호랑이배꼽마을 : 왕징면 동중리 호랑이배꼽마을은 북쪽으로 고왕산에 인접한 휴전선과 접해 있으며, 연천군에서 가장 높은 분지형태의 항아리 속 같은 아늑한 마을로, 호랑이 형상을 한 한반도의 배꼽위치에 자리하고 있어 마을 명을 '호랑이 배꼽마을'이라고 명명했다. 또한, ‘임진물새롬센터’와 ‘나룻배마을 징파나루’ 등이 있어 연천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연천의 하늘과 강과 산야가 만든 삼중주와 천혜의 아름다운 평화의 땅’ 연천군이 간직한 자연의 생태보고가 주는 감동과 휴식을 만끽할 수 있다.

- 연천평화누리길 11길(임진적벽길) : 고구려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탐방길인 11코스는 숭의전을 출발해 당포성, 동이리대대, 주상절리, 황공천, 임진교, 북삼교, 군남홍수조절지로 이어지는 19.2km 구간으로 약 5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왕징면의 중장기 발전계획 개선점

-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볼거리(문화) 조성

- 은거당 복원(조성)사업

위치 : 왕징면 강서리 798번지 일원

사업내용 : 발굴조사, 은거당 복원, 탐방로 조성 등

사업기간 : 2018년 ~ 2022년

연천군 은거당터는 미수허목선생의 생가터로 말년에 자연을 벗 삼아 저술활동을 주로 행하던 곳. 허목이 84세가 되던 해인 1678년(숙종 4)국가에 공이 많은 신하를 예우하기 위하여 왕명의 특전으로 건립된 7칸 규모의 가옥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건물은 전소하였으며 남아 있던 정원의 괴석과 희귀목들은 모두 밀반출되었다. 문제점으로는 현재 민통선 이북지역에 위치하여 군 초소를 지나야하는 불편함이 있어 향후 개발 사업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군 초소의 이전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 주민 (영농)편의 및 지역개발을 위한 기초 다지기

- 민통초소 이전사업

위치 : 왕징면 강내리, 강서리 일원

사업내용 : 초소이전 7개소, 펜스 19㎞, 보안카메라 40대 등

- 유휴지를 활용한 스무스가든 및 이를 연계한 걷고싶은 십리길 조성

- 스무스가든 및 십리길 조성

- 위치 : 왕징면 무등리 ~ 북삼리(약 3.2㎞)

- 사업내용 : 무등리 제방 풀밭에 작약 및 꽃잔디 등 초화류 식재를 통한 스무스가든(가칭) 만들기와 이를 연계하여 임진강변을 따라 십리길 조성

* 조성완료 후 6월경에 십리길 걷기행사 추진예정

권완섭 왕징면장은 “임진강이라는 강을 끼고 있는 자연환경이야 말로 왕징면의 큰 자랑거리이며, 이를 활용한 개발의 필요성과 6.25전쟁 등으로 소실되고 우리의 기억에서 점차 잊혀져 가는 문화유산에 대한 재조명을 통한 관광 자원화가 필요한 때라고 밝히며, 연천방문의 해를 맞아 이에 대한 우리들의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한편, “연천군이 2030관광산업발전을 위해 2020연천방문의 해"를 진행하고 있다. 기존의 “관광지와 트레킹코스를 새로이 조성 및 관리 중”에 있다. 연천은 “천혜의 자연이 수십만년을 거친 자연적 요인으로 인하여 잘 보존된 지형과 독특한 지질학적 특성”을 간직하고 있다. 또, 연천이 철원군과 포천시와 함께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과 한탄강지질공원 지정으로 인한 관광인프라 조성사업을 위해 노력한 결과”로 유네스코로부터 인증작업만이 남아 있으나 전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로 인하여 인증작업이 유보된 상태이나 조만간 인증서가 발급될 것으로 전망된다.

연천군이 “관광도시로 한걸음 발전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역만이 갖고 있는 역사와 문화를 잘 보존하고 유지”한다면 향후 “관광산업이 가져올 무한의 자원을 넘어 고부가가치 창출의 근원”이 되기 위한 과정에서 과도기는 분명 이곳저곳에서 나타날 것이나 과도기를 슬기롭게 겪고 난 이후의 “연천군은 관광의 도시로 거듭날 것이란 희망적인 모습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일전에 진행된 전곡읍 시내와 전통시장.상가에 대해 “상인들이 스스로 관광객 유치를 위해 거리물청소를 연천군수와 관광과 관계자가 함께한 주민 주도적 행사가 이뤄지는 관경도 목격”되었다.

연천군이 “관광도시로의 추구 노력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한사람의 노력이 아닌 모두의 동참이 있어야 성공할 것”이다. “관광도시의 표본이라 불리는 스페인의 부르고스시가 관광도시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관 주도가 아닌 주민주도형으로 주민들 스스로 진행한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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