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깊어진 음악성과 고매한 피아노 연주의 감동에 앞서 음악혼(魂)으로 대체된 무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들은 쇼팽과 슈만의 연습곡(Etudes)들과 달리 내게는 주제의식이 있는 것 같다. 지난 3월 22일 일요일 늦오후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있었던 올해 발렌티나 리시차 2020 피아노 리사이틀은 이런 면모를 명확히 보여줬다.

신종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여파로 국내 클래식 공연계가 몽땅 움츠러들었던 시점에 열린 발렌티나 리시차 리사이틀은 고매한 피아노 연주의 감동에 앞서 리시차 스스로 마스크를 쓰고 나와 연주를 펼쳤던 어려운 여건이었던 만큼 지난 2월19일 있었던 크로아티아 출신 이고 포고렐리치 무대에 이어 외국 여류 피아니스트의 음악혼이 빛났던 또하나의 무대로 간주해야 될 리사이틀이었다.

2013, 2015, 그리고 2017년 무대를 개인적으로 다 접했지만 우크라이나 출신의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 하면 보통 3시간이 넘는 레파토리를 거뜬히 소화하는 검반의 검투사의 이미지가 따른다. 이런 관점에서 올해초 서울무대에서 리시차가 마련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 피아노 소나타 29번 함머클라이버의 무대는 최근 전세계적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여건을 반영, 리사이틀 레퍼토리들을 축소한 흔적이 역력했다.

당초 이번 무대는 베토벤의 초기와 중기, 말기를 대표하는 작품을 한곡씩 선택해 근본적인 고전적 구조뿐만 아니라, 리시차에게서 과거에 볼 수 없었던 과감한 극적 표현, 그리고 그 변화를 들려줄 것으로 기대됐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최근 공연계에 불어닥친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로 연주자인 리시차마저 마스크를 쓰고 연주해야 하는 악조건속에서 당초 한국팬들에게 약속했던 리시차의 피아노 리사이틀을 지킨 것 만의 그녀의 음악혼으로 대체돼야 했다.

앞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들이 쇼팽과 슈만의 에튀드들과 달리 주제의식이 있는 것 같다고 언급한 맥락은 리시차의 2014년 데카에서 발매된 쇼팽의 에튀드 연습곡들과 슈만의 심포닉 에튀드 op. 13등을 다시 듣고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반면 리시차가 2013년 발매한 프란츠 리스트 음반은 발라드 No.2나 슈베르트곡을 편곡한 Der Mueller und der Bach, S565 no.2에서 예술성 높은 연주를 들려주는 면에서 대조를 이룬다.

최근 몇 년내 리시차의 무대에 대한 인상을 요약하면 2013년 11월 하순 내한공연은 부드러운 톤과 능수능란하게 조탁(彫琢)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던 무대, 2015년 3월 하순의 내한공연은 쇼팽의 24개의 에튀드등이 당시 건강상의 이유로 변경됐음에도 휴식과 위안을 주는 지친 마음을 다독이는 듯한 연주, 2017년 3월 중순의 내한연주는 섬세한 완급 조절로 더욱 깊어진 음악성을 체감케한 연주를 펼친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탄력을 받아 올해 발렌티나 리시차의 리사이틀 무대 역시 부드러웠다가도 태풍처럼 강렬해지는 템페스트(Tempest), 열정적 타건이 펼쳐지는 Appassionata의 이런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인상적 무대가 될 것이었으나 이날 무대의 하이라이트가 됐어야할 함머클라이버(Hammerklavier)가 말미에 중단되며 클라이맥스가 되지 못했던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 한파에 따른 옥의 티다.

베토벤 월광 소나타, 쇼팽 녹턴 20번, 리스트의 헝가리안 랩소디 2번, 라벨의 가스파르, 라흐마니노프의 프렐류드 op. 23 no. 5의 앵콜곡들로 예전의 자신의 이미지와 면모를 되살렸지만 섬세한 완급 조절로 더욱 깊어진 음악성을 체감케했던 최근 리시차의 내한무대를 기억하는 팬들에겐 올해 그녀의 내한 리사이틀은 더욱 깊어진 음악성이라기 보다 음악혼으로 대체돼야 하는 아쉬움을 남긴 무대였다.

저작권자 © 엔디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