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예술양성위원회는 선린우호의 상징으로 평화의 길을 개척했던 조선통신사의 경로중 유독 충주시 용원과 충주관아, 수안보 등에서 유숙하면서 전별연회가 열린 기록들이 많은 것을 고증으로 영화·드라마세트장 조성, 재현행사, 축제 등 역사문화콘텐츠 개발에 충주시(시장 조길형) 문화예술과와 관광과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제의(提議) 했다.

우리는 흔히 한일관계를 말할 때 ‘불행한 과거’를 언급하는데 조선통신사 사행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 양측의 문화외교전(外交戰)을 살펴보면 에도시대의 관계는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

조선통신사행은 조선과 일본의 선린(善隣)관계를 위한 정치외교의 길이자 양국의 경제와 문화가 교류되는 장이였으며 그 중심의 경로에는 육로·해로등 충주가 있었다.

17,18세기에는 동아시아의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한중일의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였으며, 그 결과 조선의 문화예술 관련 기록이 풍성하게 나타났다. 조선통신사는 500여명의 사절단으로 60여명의 악동들이 동행할 정도로 대규모 문화 사절단이였다. 1429년 첫 파견으로부터 임진왜란 전까지 8회, 그리고 임진왜란으로 일본과의 교류가 단절되었다가 국교가 재개된 1607년부터 19세기까지 12회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조선의 문화를 일본에 알리려는 차원에서 공연 분야의 기예인들을 대거 선발하여 대동하였다. 기예인으로, 마상재, 악공을 위시하여 군관, 취수 기수, 소동등을 대동해 악가무의 경우 음악감독인 전악 2명과 실제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들, 취고수,세악수 ,풍악수등 50-60여 명에 달하는 이들이 각종 연향과 행진의 음악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삼사(三使)에 배속되어 각종 수요에 응하였다. 군관 또는 자제군관중 노래에 능한 자가 맡았다. 광대놀음과 잡기 기예인, 무당, 해학이나 만담에 능한 자 등이 다수 동행하였다.

이들은 격군, 사령, 사노등의 신분으로 동원되었다. 또한 풍악수가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연주하면서 창우희나 광대담을 하기도 하였다.

저작권자 © 엔디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