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 약사사

 

경기/ 약사사 김순자 보살

 

‘무료 결혼식’ 진행하는 경기도 사찰, 약사사의 김순자 보살

봉사하고 헌신하기 위해 속세를 떠나 수행의 길을 가다.

 

교회에서 헌신하고 봉사하면서 23년을 살아왔다. 부처의 부자도 몰랐던 그녀가 400명의 신도들을 거느리는 사찰의 보살이 되었다. 보살도를 행해 내생(來生)의 공덕을 쌓아야 한다며 용인 백암 사찰터에서 ‘무료 결혼식’을 올려주고 독거노인을 모시며 산다. 공덕을 쌓고자 배풀려다 보니 경제력이 뒷받침 되어야 했다. 그녀가 잘 하는 것은 된장제조. 짜지 않은 된장을 만들어 판매한 수익금으로 오로지 공덕 쌓기에만 열중하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용인 백암 2000평 부지 ‘무료 야외 결혼식장’ 열어

경기도 광주 약사사 사찰의 김순자 보살이 사찰로 들어간 것은 오로지 봉사하고 헌신하기 위해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김 보살은 용인 백암에 2000평의 푸른 잔디밭을 만들었다. 형편이 어려운 이들에게 무료로 이곳을 빌려주어 야외 결혼식을 올려 주고 있다. 주례는 약사사의 스님이 맡고 모든 진행은 김 보살이 도맡아 해 드레스도 빌려주고 사진도 찍어준다. 결혼식에 들어가는 일체의 경비를 받지 않는다.(하객 2, 30명의 식대비만 받고 있다). 지난해 봄,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린 한 부부가 지금도 이곳을 찾으며 그날을 추억하고 있다. 김 보살은 그들의 미소를 보면 힘들어도 힘이 난다며 더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백년가약을 맺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꿈은 또 하나 있다. 청평에 가옥을 지어 독거노인(할머니) 30여분을 모실 생각이다.(현재 3분을 모시고 있다) 김 보살은 어느날 꿈에 천신 내려와 ‘일요일에 그들에게 밥해줘라’ 해서 시작한 것인데 그녀는 그보다 더 나아가 직접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극진히 보살피고 돌봐드릴 계획이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경제력을 더 키워야 하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황토방에서 숙성시킨 된장으로 봉사자금 마련

봉사도 헌신도 경제력과 노동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김 보살은 “노동이야 내 몸이 열 두 개라도 모지랄 정도로 하니까 괜찮지만 경제력은 하늘에서 뚝 덜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내가 제일 잘하는 게 뭔가 해서 된장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전라도 정읍 출신인 그녀는 그녀의 손맛을 믿고 백암 앞마당에 된장 장독대를 만들었다. 절에서 파는 것이어서 비싸게 팔수도 없다. 남들 1만2,000원에 팔면 여기선 1만원에 판다. 김 보살은 “지하수로 만들어 황토방에서 숙성시킨 메주로 짜지 않은 토속 된장”이라며 “그 맛을 자부한다”고 자신했다.

 

천도제, 없는 이들에겐 200만 원 이상 안 받아

여유가 되면 누구나 하고 싶은 게 천도제일 것이다. 죽은 조상들을 좋은 곳으로 천도할 수 있는 제를 지낸다는 건 좋은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찾아오는 사람들은 살림이 넉넉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 보다 어렵고 힘들어서 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약사사에서는 이들의 딱한 사연을 고려해 상차림 값(대략 200만원)만 받고 천도제를 올려준다. 상은 김 보살이 손수 구입하고 차린다. 이러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현재 400여명의 신도들이 약사사를 찾고 있다.

 

약사사는 몸이 아픈 사람들을 낫게 해주는 것으로 유명한 사찰이다. 병원에서 온갖 처방을 다 해보아도 소용없는 사람, 통증은 있으나 원인을 모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약사사를 찾아오면 기가 막히게 통증이 가라앉는다. 김 보살은 “어떤 사람은 집에 가면 아프고 여기 오면 안 아프다고 해서 여기서 보름을 지내다 가는 사람들도 있다”며 그들의 수발을 직접 챙긴다고 했다.

 

 

부처를 모시게 된 이유

김 보살은 23년을 교회에 다녔다. 신도도 그냥 신도가 아니라 1년 열 두 달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나님께 새벽기도를 올렸던 신도였다. 그랬던 그녀가 어떻게 불자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그녀 나이 마흔 일곱 무렵, 병원에서도 어찌하지 못하는 병이 그녀를 찾아왔다.

“몸이 아파죽겠는데 이건 뭐,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송곳이 머리를 콕콕 찌르는 통증에 어지럼까지, 병원에서 3개월, 한의원에서 3개월을 치료받았지만 다 소용없었다. 하나님이 자살하면 천국의 문 앞에도 못 온다고 했는데, 나는 고마 딱 죽고 싶었다. 죽어야 이 고통에서 헤어나지 싶었다. 아이 셋을 낳았는데 그때 막내가 막 군대 제대하고 취직도 되었던 터라 아이들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지들이 지 밥벌이는 다 하게 되었으니 나는 떠나도 되겠다, 그렇게 고통을 끊어내야겠다 생각했던 마지막 날. 올케한테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 내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고 목이 메어있으니 올케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다. 내가 여차저차해서 죽을 란다 했더니 전화를 끊어보란다. 다시 전화가 와서는 생년월일, 태어난 시간을 묻는 거다. 대답해 주고 나니 또 끊었다. 그리고는 다시 전화 와서는 ‘죽기 전에 엄마 얼굴은 한번 봐야 되지 않겠냐’며 채비를 하라는 거다. 죽을 듯이 아파서 한걸음도 못 걷겠다 싶지만 ‘그래, 마지막 가는 길에 엄마 얼굴은 한번 봐야지’하는 생각에 길을 나섰다. 그렇게 이 올케언니랑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데 가다보니 가는 길이 엄마한테 가는 길이 아니라. 어디 가느냐고 물어도 대답을 안 해. 몸은 아프지 더 이상 물을 힘도 없어 따라 갔더니 글쎄. 내 평생 단 한 번도, 근처도 안 갔던 절 문 앞에 턱 도착 한 거였다. 내가 교인인걸 알고 올케가 말도 못하고 데려온 것이었다. 문 앞에 다 와서야 하는 말이 ‘몸이 나아야 다시 교회 나가지. 아픈 몸만 낫고 가자’ 하는 거였다.”

 

“그 절의 스님이 나를 보시더니 3일 후에 기도를 올리자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10만 원의 시주돈을 내고 나왔다. 나와서 친정에 들러 백숙을 한 그릇 먹고 다시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피곤을 못 이기고 버스에서 한 숨 자다 눈을 떴는데 마치 돋보기가 씌여진 것처럼 세상이 맑게 보였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눈에 뭐가 끼인 것처럼 뿌옇게 보였는데 말이다. 차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렇게 쿡쿡 쑤시던 머리가 언제 아팠냐는 듯이 통증이 사라지고 있었다”.

 

“스님과 약속했던 하루 전날 올케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이제 안 아파서 안가도 되겠다’ 했더니 ‘사람이 약속을 해놓고 안가면 쓰냐’며 ‘몸 낫게 해줬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야단을 쳐서 다시 내려갔다. 상을 차려놓고 제를 지낸 후 스님은 나에게 ‘부처를 모셔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스님이 시키는 대로 그냥 100일 기도를 했고 저 마당에 미륵 세워라 해서 미륵 세우고, 장구 치던 법사와 혼인신고해라 해서 했고, 법사를 스님 만들어라 해서 스님 만들었고, 백암에 땅을 사서 결혼 못하는 이들을 도와라 해서 무료 야외식장도 만들고, 노인들 모시고 밥해줘라 해서 청평에 집을 짓고, 아픈 이들을 구하라 해서 다 그렇게 했다. 그렇게 15년을 살아 온 거다. 어느 날 봉사하느라고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천신의 목소리가 탁 들리는 거다. ‘잘 하고 있다. 기특하다’” 김 보살은 그때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펑펑 쏟아 내렸다고 회상했다.

 

“내 업이 끝나고 후생의 공덕을 다 쌓고 나면 다시 교회 권사로 갈지 몰라요. 사실 하나님이나 부처님이나 다 똑같은 신이에요. 저는 부르는 이름만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배척하고 싸우고 할 필요가 없어요”

 

김 보살은 생전 술도 담배도 몰랐다. 텔레비전도 모른다. 여명이 채 오지 않은 새벽 5시 그녀는 기도를 하러 방문을 나섰다. 23년은 하나남의 딸로, 이후 지금까지는 법당을 지키는 보살로 스님을 모시며 그렇게 그녀의 삶은 늘 피안의 세계를 향해가고 있었다.

 

 

 

경기도 광주시 중앙로 203번길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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