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SH ROADS TO INDEPENDENCE

폴란드 독립 100주년을 맞아 주한 폴란드대사관은 "독립을 향해 걸어온 폴란드의 길"이란 기고문을 엔디엔뉴스에 다음과 같이 기고해왔다. -편집자주

1918 년 11 월, 123 년간 유럽 정치 지도 상에서 사라져 있던 폴란드가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이는 독립을 잃었던 동안에 폴란드의 젊은 세대에게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전승하며 활발히
활동하던 사회 구성원들의 근성과 희생 덕분이었습니다. 제 1 차 세계 대전(1914-1918)
동안에는 폴란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유리한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나라들은 서로 적으로 돌아섰으며, 이전까지 폴란드 문제에 대해 갖고 있던 연대를 깼습니다.
100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배를 받으며, 민족 봉기는 유혈 진압되고, 정치적 억압, 시베리아로의
유배 그리고 19 세기말 20 세기 초 강화되어 갔던 러시아화 및 독일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독립에 대한 열망을 품어왔습니다. 폴란드 엘리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농민들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폴란드의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고, 다양한 방식으로
독학하며, 끝까지 폴란드어로 교육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모든 폴란드 정치 정당들의 활동의
전제에는 폴란드의 독립이 있었습니다. 폴란드 민족 생활의 중심지는 1860 년대부터 폭넓은
정치적 주권을 가질 수 있던 갈리치아 지방이었습니다. 그 곳에서는 러시아 지배 지역에서 쫓기던
활동가들이 은신처를 찾았고, 폴란드 정치 정당들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학교와 행정, 사법
기관에서는 폴란드어가 쓰였습니다. 이 곳에서는 민족 봉기 기념일이나 5.3 헌법 제헌일 같은
폴란드 민족 행사를 기념하기도 했습니다.
19 세기 말과 20 세기 초, 러시아와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간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독립을
되찾으려는 폴란드인들의 희망은 커져갔습니다. 당시 붉어진 수많은 국제 위기(모로코 위기, 발칸
위기 등)로 인해 범 유럽 전쟁의 조짐은 점점 더 현실화되어 가고, 이에 따른 폴란드 문제도 국제
문제화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에 걸맞게 대비를 하여야 했습니다. 1908 년 유제프
피우수드스키(Józef Piłsudski)는 자신의 동지들과 함께 르부프에서 투쟁 운동 연합을
설립했습니다. 곧 이어 갈리치아 지방에서는 폴란드 젊은이들의 군사 훈련을 조직하고, 이들을
독립 투쟁에 투입 시키기 위해 준군사 조직(예. 소총수 연합)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914 년 여름, 전쟁이 시작될 무렵 폴란드인들은 분쟁의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에 관한 딜레마에
직면했습니다. 유제프 피우수드스키를 비롯해 일부는 동맹국과 연합하며 폴란드 독립에 대한
희망을 걸었습니다. 동맹국 군대를 도울 폴란드 보병 군단이 만들어졌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로만 드모프스키(Roman Dmowski)등의 인물들) 러시아와 이들의 서방 동맹국들이
분할된 폴란드 영토를 우선 하나로 합친 뒤, 폴란드의 독립을 되찾아 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각
분할국 군대에 속한 수십만 명의 폴란드인들에게는 이 전쟁은 동족상잔의 전쟁과도 같았습니다.
게다가 전쟁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물질적 손실을 야기했으며, 수십만 명의 사람들은 전쟁
난민으로 자신의 고향을 떠나야 하는 상태에 내몰렸습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 폴란드인들은 조국의 주권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 무기를 들었습니다.
1914 년 8 월 6 일 여단의 선봉에 섰던 유제프 피우수드스키는 무기를 손에 쥐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국경을 넘어 러시아가 지배하던 영토로 넘어갔습니다. 곧 갈리치아 지방에서는 폴란드
군단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 년이 지나지 않아 이 군단은 세 개의 여단으로 나뉘어져 총
2 만-2 만 5 천명의 병력이 투입되었습니다. 제 1 여단의 수장은 유제프 피우수드스키가
맡았습니다. 1914-1916 년에 군단은 마워폴스카(Małopolska), 동 카르파티(Karpaty
Wschodnie), 루벨슈취지나(Lubelszczyzna), 보윈(Wołyń) 등지에서 싸웠습니다. 동맹국의
도움으로 폴란드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이들은, 1914 년 여름 크라쿠프에서 폴란드를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기구인 민족 최고 위원회를 발족했습니다.

이에 따라 연합국과의 협력을 지지하는 세력은 1914 년 11 월 바르샤바에 설립된 폴란드 민족
위원회에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로만 드모프스키는 위원회 지도부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천
여명의 군인이 투입된, 당시로서는 크지 않은 보병 군단인 이른바 푸와프스키 군단(Legion
Puławski)이 러시아 군대 내에 창설되었습니다.
1915 년 독일이 바르샤바를 점령하자 폴란드 민족 위원회는 페테르부르크로 옮겨갔고,
푸와프스키 군단은 엄청난 손실을 입고 거의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2 년 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드모프스키는 프랑스로 이동하여 파리에서 또 다른 위원회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곧 연합국 측에서 그리고 망명 정부에서 폴란드 문제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일명 바욘취치(bajończycy)라 불리는 작은 보병 군단이
만들어졌습니다.
1915 년 여름 1916 년 11 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폴란드 문제의 전환점이 마련되었습니다.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황제들은 러시아로부터 빼앗은 영토에 폴란드를 재건할 것을 선언(일명 11 월 5 일
법)했습니다. 이는 폴란드 문제에 대한 비밀 협정을 위반한 것이었습니다. 몇 달 뒤 러시아에서는
차르의 정권이 무너졌습니다. 새로 들어선 러시아 당국은 폴란드인들의 자치권을 인정했습니다.
곧이어 프랑스와 영국도 이를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동맹국이 폴란드의 실질적인 독립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피우수드스키가 이들과의 동맹을 저버리면서 감금을
당하게 되고 군단은 해체되었습니다.
폴란드인들은 11 월 5 일 법이 발표된 초반 기대와는 다르게 빠르게 실망했습니다. 빌헬름 2 세
황제와 프란츠 요제프 1 세는 폴란드의 국경선을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미래의
군주에 관한 문제에서도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들이 단지 폴란드 병력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
명확해 졌습니다. 몇 달 뒤, 점령 지역에는 임시 국무 회의, 섭정 위원회, 정부 등과 같은 폴란드
공공 기관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점령국 당국에 대한 자문 기능만을 수행할
뿐이었습니다.
1917 년 봄 폴란드 군단에 소속된 군인들 사이에서는 미래에 대한 좌절과 불확실함이
커져갔습니다. 군단은 당시 독일 군부의 지휘 아래 있었으며, 미래 폴란드군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군단 소속 군인들은 군단이 폴란드 민족 군대의 성격을 잃을 것을 우려하였습니다. 폴란드 문제의
국제적 맥락 또한 변화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차르 정부가 무너지고, 강력한 미국이 동맹국에
대항하여 참전에 나섰습니다. 전쟁 초반 동맹국과 전략적 동맹을 맺었던 피우수드스키는 당시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1917 년 7 월, 상황은 위기에 치닫게 되었습니다. 피우수드스키의
독려로 대부분의 군인들이(주로 그의 편에 섰던 제 1, 3 여단 군인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동맹군과 동맹을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새로운 군사 서약에 거부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그
결과로 폴란드 군단은 해체되었습니다. 옛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 군단 소속 군인들은
칼리슈(Kalisz) 근방의 슈취피오르노(Szczypiorno)와 졔그졔(Zegrze) 남쪽의
베니아미누프(Beniaminów)와 웜자(Łomża)의 수용소에 감금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 군인들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군대에 병합되어 이탈리아의 전선으로 보내졌습니다.
감금된 군인들을 위해 폴란드 사회는 재정적, 물질적 모금을 주도했고, 군에서 도망친 이들이
당국의 감시를 피하는 것을 돕기도 했습니다. 피우수드스키 자신 또한 막데부르크(Magdeburg)의
오래된 요새에 있는 군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피우수드스키 주변에서는 민족적 순교자들의
신화가 싹트고 있었습니다. 그의 1 년이 넘는 수감 기간은 동맹국들의 동맹에 대한 증오심을
떨치고, 전쟁 후에 큰 의미를 갖게 될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신뢰를 쌓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이 오스트리아군에 속했던 제 2 여단 군인들만 서약을 했고, 이들은 폴란드 예비
군단으로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군대에 속해 러시아와의 전쟁에 계속해서 참전하였습니다.
이 군단은 유제프 할러(Józef Haller)가 이끌었습니다.

폴란드 문제의 해결을 위해 폴란드 문화계 명사들은 서구에서 로비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그나치
파데레프스키(Ignacy Paderewski)는 폴란드 전쟁 희생자들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고 서방
세계 정치인들이 폴란드 독립을 지지할 수 있도록 설득했습니다. 그 노력의 결실로 1917 년 4 월
전쟁에 개입했던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폴란드를 친화적으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곧이어 폴란드 독립의 필요성이 인정 받았고 다른 연합국들도 이를 인정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주로 재외 폴란드 동포 커뮤니티에서 차출된 보병으로 이루어진 폴란드 군이 창설되었습니다.
1917 년 봄 러시아 군에서 차르의 정부가 전복 되자, 폴란드인으로 구성되었던 조직들(3 개
군단)이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러시아 내부에서 커져가는 혼란으로부터 되도록 멀리
떨어지려 하였고, 10 월 혁명 이후에는 백군과 붉은 군대 사이의 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러시아 내부와 이들의 서방 동맹국이었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변화를 겪으면서,
이들은 폴란드를 동맹국으로 여기고 싶어 했습니다. 1917 년 여름 프랑스에서는 푸른색 군복으로
구분되는 폴란드군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군대에는 서유럽, 미국, 캐나다 군에 있던
보병과 독일 군대에 있던 폴란드인 포로들도 합류하였습니다. 푸른 군대는 독일과의 전쟁에
참전하며 종전이 될 때까지 함께 싸웠습니다.
1918 년 2 월 동맹국과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에게 불리한 내용을 담은 브졔스키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실망감을 느낀 폴란드인들은 동맹국들과 완전히 단절한 채, 연합국에 폴란드
독립의 희망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동맹국의 편에서 싸우던 폴란드 군단도 해체되었습니다.
1918 년 1 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해양으로의 진출이 보장된 독립 폴란드 건설을
항구적 평화 정착을 위한 조건의 하나로 선언했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이 신생국인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체결한 조약에 관한 소식이
헤움지방(Chełmszczyzna)에 전해졌습니다. 이는 폴란드 여론에서 광범위하게 분노를
야기했으며, 이 조약은 또 한 차례의 폴란드 분할로 인식되었습니다. 이 분노는 격렬한 시위와
파업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갈리치아 지방의 공무원들은 일을 그만두었고, 정부로부터 메달을
수상한 이들은 이를 반환하였으며, 작위를 받은 이들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비엔나 의회의 폴란드
의원들은 정부 당국에 반대로 돌아설 것을 선언했습니다. 또한 폴란드 예비 군단도
해체되었습니다. 이 군단의 일부 병사들은 러시아 국경으로 넘어갔으며, 일부는 감금되었습니다.
크라쿠프, 1918 년 2 월 16 일 폴란드 언론이 바라보는 동맹국에 대한 시각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해 졌습니다.
폴란드인들 사이에서는 급진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의식이 싹텄고, 1914 년 피우수드스키가
조직했던 폴란드 군사 조직과 비슷하게 비밀 조직과 비밀 언론이 퍼져 나갔습니다. 폴란드 사회의
대다수의 국민들이 연합국의 승리를 기원했고, 향후의 상황 전개를 지켜보았습니다.
10 월과 11 월 서유럽에서의 전쟁이 끝이 나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무너지면서,
폴란드인들은 점령군을 무장해제하고 독립적인 국가 기관을 세웠습니다. 독일군에게 풀려난
유제프 피우수드스키는 바르샤바로 돌아와, 1918 년 11 월 11 일 섭정 위원회에게서 행정권과 군
통치권을 넘겨받아 국가 수반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폴란드 역사의 새 장이 열린
것입니다.
1918 년 10 월 초, 독일이 미국과 휴전 조건을 놓고 협상을 체결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폴란드에서는 정치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섭정 위원회는 연안을 접하는 폴란드 왕국의
설립을 선포하는 한편, 점령 당국의 명령은 점점 더 자주 보이콧했습니다. 이어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붕괴하자, 이 지역은 새로운 독립 국가를 형성하거나(예. 체코 슬로바키아) 인접
국가와 합병을 했습니다. 1918 년 10 월 28 일 폴란드 청산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위원회는
갈리치아 지방에서 권력을 넘겨 받는 문제를 맡았습니다. 서 갈리치아 지방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비슷한 권력 기관이 생겨났고, 르부프를 비롯한 동 갈리치아 지방에서는 우크라이나인들이
권력을 잡으려고 다투었습니다.
11 월 6 일 밤, 점령에서 해방된 폴란드 왕국의 루블린에서는 사회주의자인 이그나치
다쉰스키(Ignacy Daszyński)를 수장으로 하는 좌파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8 시간 근무제, 소농과
소작농을 위한 토지 분할, 주요 산업 분야의 국영화 등 광범위한 사회 개혁 프로그램이
등장했습니다. 많은 이들은 볼셰비키에게 점령된 러시아처럼 혁명의 혼란으로 인해 굶주린
나라가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질까 우려하였습니다. 스페인 독감의 유행으로 사망자까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0 월과 11 월 사이에 폴란드 군사 조직원들과 학생, 대학생, 젊은 노동자,
스카우트 대원, 소방관, 철도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점령군의 무장해제에 동참했습니다.
전국에서 지역 권력 기관이 생겨나면서, 각지의 점령 당국들과 갈리치아 지방의 오스트리아 점령
당국의 공백을 메우려고 노력했습니다.
프러시아 점령지에는 1918 년 12 월까지도 프러시아 권력 기관이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1918 년 여름 발족한 민족 인민 위원회는 폴란드의 중심 정치 기관이 되었습니다. 점령 당국에
대한 군사적 행동은 12 월이되어서나 실행되었습니다. 독일 베를린의 새로운 공화당국은
1914 년부터 구속력을 발휘했던 동쪽 국경이 유효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11 월 10 일, 몇 일 전 풀려난 유제프 피우수드스키가 베를린 발 바르샤바 행 기차로
도착했습니다. 독일은 그의 권위로 혼란이 잠잠해 질 것으로 믿었으며, 그는 러시아에서 돌아오는
독일 군의 무탈한 이동을 보장하였습니다. 다음날 섭정 위원회는 그에게 행정권과 군사권을
통째로 이양했습니다. 피우수드스키는 국가 수반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루블린 정부 또한 그에게
예속되었습니다. 1914 년부터 1918 년까지 물적, 인적 손실이 정확히 얼마나 났는지도 추산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독립 폴란드의 정부 구조와 국경을 두고 다투는 지난하고 극적인 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저자: 피오트르 슬란타 박사 (dr hab. Piotr Szlanta)
출처: https://niepodlegla.gov.pl/en/about-niepodlegla/polish-roads-to-indepen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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