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양산성의 최초축조 년도 및 성곽을 쌓은 주체가 명확하지 않다고 양분되어 각기 다른 주장으로 대립된 학계!

【취재본부/ndnnews】안홍필 기자= 계양산성은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10-1일월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벽 둘레는 1,184m로 백제시대 서기 371년에서 392년 사이인 4세기 후반에 축조된 협축식(夾築式) 산성으로 1992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 관리되어 오고 있다.

계양산성은 서북으로 한강 하구, 북쪽으로 김포평야가 한눈에 들어오고, 서쪽으로는 서해와 강화가 서남쪽으로는 서울의 관문인 인천항이 시야에 들어온다. 예로부터 계양산성은 인후지지(咽喉之地)로 일컬어졌다. 이는 목구멍과 같은 인천과 심장과 같은 서울의 관계나 백제의 관문인 계양산성과 수도인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과 관계가 같다는 의미일 것이다.

계양산과 주변마을인 계산동에서 발견된 두 개의 돌도끼가 있다. 이를 토대로 하면 계양에는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사람들은 바다나 강 주변에서 점차 내륙 쪽으로 생활무대를 옮겨가면서 돌도끼를 사용하여 농경생활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계양(桂陽)이란 지명은 고려 중기 계양산에서 비롯된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그러나 계양지역의 역사는 그보다 휠씬 이전인 선사시대로 올라간 문헌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 주부토(主夫吐)란 이름이 등장한다.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 부평군에 분래 백제의 주부토인데 신라 경덕왕16년(757)에 장제군으로 고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계양이란 이름은 약 90여년(1215년~1308)간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이규보(李奎報)가 생존했던 연대(1168~1241)와도 겹치며 그가 ‘방해지’에서 당시 이 지역 계양산 일대를 ‘계양’으로 불려 당시 지명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고 계양은 충선왕 2년(1310)에 부평부로 바뀌면서 주로 부평이란 이름이 사용되어 계양의 역사와 연혁을 살피고자 할 때는 일단 부평이란 이름의 사용 전과 후로 나누고 부평군이 설치된 후 인천광역시로 편입되기까지와 선사시대 유적과 유물을 통해 문헌기록 이전의 역사를 살피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계양산성은 문학산성(文鶴山城)과 함께 인천의 고대산성으로 일컬어져 왔다. 하지만 이렇다 할 학술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다가 2000년 계양산 일대의 대해 학술적인 지표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를 토대로 2003년 계양산성의 서벽 일부를 발굴, 2004년, 2005, 2006년에 동벽과 제1 집수정과 제3 집수정을 발굴했으며 3차례 발굴과정에서 계양산성의 구조와 성격을 밝혀냈다. 특히, 제1 집수정 바닥에서는 A.D 400년(AMS 측정 연대) 전후시기의 목간()이 발견되어 한성백제 시기의 역사와 문화 연구 자료로써 중요한 역할을 제공하고 있다.

계양은 고구려 장수왕의 강력한 남진정책의 결과 장수왕 63년(475) 백제를 공격 개로왕을 죽이고 한성을 점령 고구려의 영토가 된다. 이후 고구려는 김포반도를 점령한 뒤 이 지역에 주부토군을 설치한다. 6세기에 들어 고구려의 혼란한 틈을 타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공동전선 구축 후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는 한강유역을 공격 계양은 다시 백제의 영토가 된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 14년(553)이 동맹을 깨고 한강 하류까지 차지하는 승리에 의해 신라의 영토가 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삼국의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과정에서도 계양은 여전히 주부토로 불린다.

신라(진흥왕 14년, 553) 영토에 편입된 이후 경덕왕 16년(757) 대대적인 한화(漢化)정책에 의해 지명이 장제군(長堤郡)으로 바뀔 때까지 약 200년 동안 주부토란 이름으로 불리었다.

최초 성곽을 축조한 시기는 백제시대 서기 371년에서 392년 사이인 4세기 후반에 축조된 성곽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계양산성은 먼저 서벽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깊이 약 5m지점까지 성벽기반을 조성, 원래의 경사진 암반을 따라 계단식으로 굴착한 후 수평을 맞춘 기단부에 사질 점토를 약20~30m의 주께로 깔아 기반토를 다지고 그 위에 축조했다. 이와 같이 지반을 굴착한 후 정지 면을 따라 암반위에 성벽을 축조한 협축식(夾築式) 산성이다. 이 방식은 서벽에 이어 동벽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협축으로 축조된 성곽 내탁의 내부를 채우는 뒤채움 방식이 판축식 점토다짐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백제산성의 전형적인 축조방법에 새로운 방법을 채택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 같은 수법의 예는 포천 반월산성, 이천 설봉산성, 안성 죽주산성, 충주 장미산성 등이 있다. 산성의 특성은 대게 4~5세기경 백제시기 산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축성법이다.

제 1집수정 내부에서 상당수의 토기편과 기와편, 목재편 등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집수정 기저부의 뻘 다짐층 위에서 원저단경호와 함께 목간, 연질 회색토기대부 완을 비롯해 호.병류가 출토되었다. 원저단경호와 같은 유형의 토기는 서울 풍납토성을 비롯해 4~5세기경 한성백제 시기의 유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계양산성에서 출토된 ‘논어 목간’의 서체는 돈황문서(敦煌文書)나 누란잔지(樓蘭殘紙)에 사용된 4~5세기경(AMS측정연대가 A.D 400년과 A.D 480년으로 검출 과학적 연대와 고고학적 연대가 부합됨) 사경체(寫經體)와 관계가 깊다. 이런 사경체는 해서가 정착되기 전, 해서 필획이 갖추어지기 전의 필획법(筆劃法)으로 예서와 초서에서 해서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타나는 필획법에서 볼 수 있는 서체이다. 사경체는 중국 위진(魏晉) 시기에 유행하던 사경체에 해당하여 고구려(372년)나 백제(384년)에 불교(佛敎)가 전례 되는 시기와 관계가 깊다. 당연히 불교가 들어올 때 불경을 필사한 사경도 함께 들어왔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75년 경주 안압지 발굴 시 처음으로 신라 목간이 출토되기 시작하면서 월성 해자, 황남동 유적,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부지 등에서 신라시대 목간이 출토 되었으며 함안 성산산성에서 많은 목간이 출토되었지만 성산산성의 목간의 기록 시기는 6세기 중반 경으로 추정되며, 경기도 하남시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목간은 6~7세기로 보고 있다. 또한 가야(伽倻) 수도인 김해 봉황동 저습지에서 ‘논어’ 목간 4면으로 된 고(柧.觚)가 출토되었으나 이 또한 6~7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그 동안 백제 목간은 1983년 부여읍 관북리 사비도성의 왕경유적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이래 부여 궁남지, 쌍북리, 능산리 등지에서 목간이 출토되었다. 이들 사비(부여) 시기의 목간은 대개 6세기부터~7세기까지 되었던 것들이다.

계양산성의 초축 연대는 4~5세기 경 즉, 한성백제시기로 볼 수 있으며 초축 이후 수차례 수축과 개축을 거듭하며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계양산성은 한성백제의 왕성인 풍납토성으로 진입하는 한강(漢江) 어구(於口)의 초입에 위치한 관문(關門)이자 요새(要塞)이기 때문에 고구려와의 전략적인 중요성 외에도 대륙에서 들어오는 문물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으로 특별히 관할했을 가능성이 많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곽이었을 것이다.

인천시 문화재 관련 담당자는 계양산성의 주체인 계양구 담당자와 협조 하에 적극적인 문화유산 지정을 위해 역사적 고증과 학술적 가치 등 양분되어 있는 의견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역사문화의 전문가 기관에 의뢰 7월 중 출토유물 등을 토대로 자료를 정립 학술 세미나를 개최 최종보고서 작성 및 문화재청에 제출할 자료가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밝혔다.

취재과정에서 나타나듯 한지역의 문화적 가치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곳의 노력이 아닌 전체의 관심과 노력이 있어야할 것으로 보이며 이는 특정 지역의 영광이 아닌 인천시 전체의 역사적 가치를 입증하는 중요한 문화적 가치가 따르는 일이다. 어느 한 개인적인 역사적 주장으로만 볼 것이 아닌 각기 다른 여러 주장을 한자리에 모여 수많은 역사적 사료와 자료를 찾아 입증하고 대립되어 있는 견해를 하나의 목소리로 모아야 계양구를 넘어 인천시 아니 대한민국의 역사적 가치가 정립되리라고 판단되며, 뛰어난 옛 선조들의 건축술과 나라를 위해 수많은 이름 모를 민초들이 목숨을 바쳐 싸워 지켜온 위대한 문화유산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만이 퇴색되어가는 우리의 역사를 지키는 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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