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류 라벨 전문 기업 글로리텍스비나 전현기 대표

베트남 진출 기업/글로리텍스비나 전현기 대표

인도차이나반도 동부에 자리 잡고 있고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와 접하고 있는 나라, 한국과의 시차 시간 2시간, 5개의 시와 58개의 성으로 이루어진 인구 약 9,600만명, 1인당 GDP 2천300달러인 나라, 바로 베트남이다.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한지 올해로 25주년을 넘어섰다. 우리 기업들의 베트남 진출은 지속적으로 확대 돼 2016년 연말 기준 약 4천 224개(한국수출입은행 통계)의 기업이 진출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중에는 분명 성공한 기업도 있고 실패한 기업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베트남 인건비의 지속적인 상승으로 인근의 캄보디아와 미얀마, 인도 등으로 공장을 이전 하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베트남 현지에서 굴지의 기업으로 주목받고 있는 업체가 있다. “한국이나 베트남이나 사람 사는 곳은 다 같은 곳”이라며 진심(眞心)으로 업계를 이끌어 온 의류 라벨 전문 기업 글로리텍스비나(대표 전현기)를 조명해 본다.

 

베트남의 잠재력과 시장성

글로리텍스비나는 2003년 베트남에 들어와 15년째 사업을 펼치고 있는 의류 라벨 전문 기업이다. 글로리텍스비나의 전현기 대표는 한국과 베트남의 수교 이후 봉제 공장이 이전하는 것을 가까이서 지켜 본 사람이다. 당시 부산에서 디자인 사업을 하던 전 대표는 업무 지원 차 베트남에 주둔한 봉제 공장을 드나들었고 자연스럽게 베트남의 잠재력과 시장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령화 된 한국과 달리 젊은 노동력, 싼 인건비, 비록 덥다 할지라도 한국의 4계절과 달리 여름 한 철만 대비하면 되는 소소한 것들까지 베트남의 장점들이 크게 다가왔다.

사업을 결정짓고 진출하기 까지 3년의 시간을 준비했음에도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현지인과의 소통부터 근로자 교육, 공장 설비와 임대 문제, 그리고 음식 문화까지 모두가 풀어야 할 난제들이었다. 그러나 전 대표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게 그는 묵묵히 그의 길을 걸었고 15년이 지난 지금 베트남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나와 너를 구분 짓지 않는 인간적인 관계 유지가 중요

글로리텍스비나에는 한국인 직원 5명, 베트남 직원 200여명이 근무하고 있다. 한국인 직원 중에는 전 대표의 아들 전희주씨도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 사업을 돕기 위해 2006년 베트남으로 들어왔으니 그가 들어온 지도 12년째다. 전 씨는 “베트남 생활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며 “아버지 사업을 도와 더 단단하게 키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소신을 밝혔다.

전 씨는 아버지보다 현지 근로자들과 접촉할 일이 더 많을 것이다. 그는 이 곳 근로자들에 대해 “10여 년 전만 해도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나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대학을 졸업한 고학력자들이 대부분”이라며 “베트남 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도 함께 쓰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공감도 높아지고 일에 대한 이해도도 좋아 일의 능률이 함께 오르고 있다”고 전했다. 아울러 “베트남의 미래가 한층 밝게 느껴지고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내다봤다.

글로리텍스비나 역시 근로자들과 마찰이 없던 것 것은 아니다. 일부 노동자들은 인건비를 올려 달라며 삼삼오오 모여 분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회사 규정에 따른 원칙과 규칙에 의해 처리하다 보니 큰 분란으로 번지지 않았다. 전 대표는 “제가 사장이라고 회사가 제 마음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다”며 “직원들 월급은 매년 1회 인상을 하고 있고 그 외 모든 것도 회계 파트에서 규정대로 처리해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 대표는 “베트남 사람들이 온순한 반면 게으르다는 편견이 많은데 어느 사회든 착한 사람이 있으면 나쁜 사람이 있고 부지런한 사람이 있으면 게으른 사람도 있기 마련”이라며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와 너를 구분 짓지 않고 인간적으로 마음을 주고받았을 때 다 같이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도전해 새로운 시장 개척

최근 베트남의 인건비가 지속적인 상승을 보이고 있다. 작업 환경도 변하고 있어 지난해까지만 해도 당연시 되었던 야간작업은 범국가적으로 금지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공장 시설도 자동화 되는 등 베트남 내에서도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이로 인해 일부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을 떠나 가까운 캄보디아나 미얀마, 인도로 재진출을 꾀하고 있다.

전 대표는 “그래도 아직까지는 봉제공장이 많이 들어서 있고 향후 4, 5년까지는 지속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다만 “공장에서 기술을 배워 나간 현지인들의 업계 진출로 시장이 좁아지고 있는 실정”이라며 “현실을 직시해서 물려줄 수 있는 기술들은 물려주고 우리는 새로운 기술로 더 업그레이드 하여 시장을 확보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최근 베트남에는 중공업과 전자 산업이 발을 들여놓고 있다. 전 대표는 의류 라벨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상표 라벨 등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한 계획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베트남의 일상 “식모요? 없습니다. 제 밥은 아내가 해 줍니다”

한 기업의 오너라고 하면 당연히 큰 저택에 가정부와 일꾼들을 부리고 살 것이라 생각했지만 전 대표는 호찌민 12군의 한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아내와 단 둘이 살고 있다. 그의 아들도 PMH(phu my hung) 아파트에서 아내와 세 딸이 함께 산다. 그는 “사람들이 베트남 가면 인건비가 싸니까 일하는 사람을 부려서 황제처럼 살 수 있다 하는데 다 그런 건 아니다”며 “우리가 한국에서 살던 대로 사는 거지 여기 왔다고 달라지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또 “우리는 돈이 많고, 너희는 돈이 없다는 차별화된 생각은 아예 하지 말 것”이라고 덧붙였다. “어느 사회고 사람 사는 사회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이곳에 올 경우에는 이곳 사람들과 더불어 살 것을 생각하고 와야 한다”고 조언했다.

15년 전 처음 베트남에 왔을 때 전 대표는 떵번군에 있는 한 공장을 임대해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7년 후 롱안성에 자가 공장을 세우며 지금의 신화를 이루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사회 나눔 활동에는 변함이 있다. 떵번군에 있을 때는 떵번군 내 위치한 초등학교에 도서관을 만들어 주었고 롱안성으로 와서는 구호위원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자전거와 학용품 등을 지원하고 있다. 그의 아내도 한인회 여성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지금도 각종 사회봉사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전 대표는 “아내의 아낌없는 헌신에 늘 감사하다”고 했고 “글로리텍스비나 라는 회사 이름을 짓는데 새부산교회 정신목사님의 기도가 큰 역할을 했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베트남에 진출해 성공신화를 이끈 글로리텍스비나의 전현기 대표는 그야말로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솔선수범하고 있는 올바른 기업인 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사는 세상, 진심과 배려가 함께 하는 공간, 글로리텍스비나에는 이러한 인간 중심의 확고한 가치관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글로리텍스비나의 성공 신화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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