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식품 윤병국대표

유미식품 윤병국 대표

 

위생과 제품으로 승부중국인들의 마음 움직여

냉동면 하나로 세계 31개국 수출에 성공!

 

사드로 인해 중국의 불합리한 통제가 이어지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와는 달리, 정치와 경제의 분리된 시각으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유미식품의 윤병국 대표를 만나 보았다. 올해로 중국 진출 19년이니 잔뼈가 굵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변두리에 살고 있다는 마음으로 지난겨울에는 손자를 비롯 온 식구를 대동하여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으로 나갔다. 한국과 중국을 넘나드는 그에게 성공의 동력이 있다면 앞으로 일어 날 일을 늘 예측하는 것이다. 여기엔 ‘우물 안 개구리’적 사고가 가장 큰 적이라고 말하는 윤 대표를 만나 인터뷰의 시간을 가져 보았다.

 

1. 중국에 언제 진출했나?

한국에서 축산업 관련 식품 사업을 했는데, 엑기스, 통조림 등을 가공하여 중국을 들어가 1999년에 땅을 샀고, 2000년에 공장을 지었다. 모르는 쌀장사 보다 아는 보리장사가 낫다고 계속 식품업만 해왔다.

 

2. 한국에서는 어떤 사업을 했나

처음에는 축산물 유통을 했다. 전 세계의 축산품을 수입을 하여 가공 및 유통을 했다. 한냉, 축협보다 규모가 컸다. 그러나 다이옥신, 구제엽 등의 여파로 많은 손실을 입은 후, 쉬자는 생각으로 중국행을 했다. 10년 동안은 정말로 쉬었다. 쉬면서 여유를 갖고 중국 시장을 공부했다. 그리고 10년 후부터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으니 19년이 된 것이다.

 

3. 특별히 사업을 시작하게  계기가 있나?

가만히 국제교류가 흘러가는 정세를 보니 북한과도 교류가 될 거 같더라. 오토바이, 자전거 타고 한 동네로 섞일 거 같더라. 넓은 시장과 필요성을 보고 공장을 지은 것이다. 2, 3년 사이에 회사는 자리를 잡았다.

 

4. 아이템은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일식집이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는 전부 냉동면을 쓰고 있더라. 냉동면이 비전이 있을 거 같아서 선택을 했다. 처음에는 소스를 개발해서 냉동짜장, 냉동냉면 등을 시도해 봤으나 검역이 너무 심하다 보니 냉동우동면 하나만 집중적으로 하고 있다. 우동면은 면발이 굵어서 직접 삶으려면 15분 정도가 소요 된다. 식당에서 바쁜 시간에 급속 냉동면을 사용하면 훨씬 편리하다. 1분이면 해동해서 먹을 수 있다.

 

5. 종업원은 얼마나 되며 임금은 어느 정도인가?  

초창기 창업했을 때는 70명이었는데, 지금은 자동화 설비를 늘리다 보니 30명 정도로 줄었다. 임금은 초창기에 왔을 때는 500위웬화 정도를 줬는데, 지금은 10배 정도 올랐다. 4대 보험, 퇴직금, 복지제도 등 회사가 부담해야 할 부분이 커졌다. 그래도 상해나 북경에 비하면 연태는 반도 안 된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연태는 사업을 하는데 있어 지상의 낙원이다.

 

6. 중국 식품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있는데 해외 판매망을 뚫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처음에는 중국에 위생관념이라는 것이 부족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위생법과 제도를 도입하면서부터 중국만큼 까다롭고 엄격한 나라가 없다 싶을 정도로 검열이 철저해졌다. 해썹(HACCP)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탑재한 이후, 일본, 미국, 한국과는 게임이 안 될 정도로 위생 검열이 까다로워 졌다. 한 번은 수산물 공장의 햅썹(HACCP)시설을 방문 한 적이 있었는데, 거의 특급 호텔 수준이더라. 그 정도 시설이나 기준이 아니면 생산을 못 하게 하고 있다. 앞에도 말했다 시피 우리 회사에서도 냉동면에 소스까지 개발하여 냉동 짜장, 냉동 냉면 등을 제조하려고 시도했으나, 엄청난 식품 위생법이 저해가 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엄청난 시설비를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까다로운 규제에 걸려서 못 하고, 냉동 우동 하나만 통과 되어 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언론에서 중국산이라고 하면 무조건 저질 음식으로 폄하하는데 모르는 소리다. 고춧가루도 중국산이 가장 좋다. 너무 좋아서 그것만 공급을 못할 정도이다. 한국 쌀이 아무리 좋아도 중국의 동북 쌀은 절대 못 따라 온다. 한국 쌀은 여름이 되면 질이 많이 떨어지나, 동북 쌀은 그대로이다. 한국에서 농촌을 지키기 위해 다소 과장된 언론보도를 하는 것 같으나 내 견해에서 봤을 때, 중국산도 좋은 먹거리들이 많다. 

 

7. 판매처는 어디인가?

처음에는 기계를 면세로 들여왔기 때문에 5년간은 내수를 못했다. 31개국 정도에 수출만 했다. 5년이 지난 지금은 내수를 공략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활성화가 안 되고 있다. 중국내에도 규모가 크고, 최첨단 시설을 갖출 경쟁업체가 많기 때문이다.

 

8. 사업을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충분히 중국을 답사한 후 시작한 사업이었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단지 요즘 공장 앞에 짓는 아파트 공사 때문에 마찰이 좀 있다. 냉동기계에서 나오는 암모니아 가스 문제라든지, 주거 허가 문제 등으로 트러블을 겪고 있는데, 서로 양보하면서 잘 타협하고 있다.

 

 

9. 사드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나?

솔직히 언론에서 보도하고 있는 것처럼 심각하지 않다. 적어도 나는 못 느낀다. 오히려 중국 측에서 우리의 사업을 보호해 주려고 신경을 쓰고 있다. 일부에서는 사드 이후 규제가 강화되어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고 하는데, 중국은 원래 규제가 까다로운 곳이다. 사드가 아니어도 검열이나 규제를 까다롭게 하는 편이다. 그 때문에 중국기업의 70% 이상이 문을 닫기도 한다. 특별히 사드로 인한 한국기업에 대한 보복성 검열 강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 한국인들의 집이나 회사에서 일을 하던 종업원들이 자존심을 운운하며 그만 두는 경우는 봤다. 그러나 기업이 노골적으로 피해를 본 경우는 거의 없다. 롯데나 관광업에 후폭풍이 닥쳤다 하는데, 그건 정책적 사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10. 중국이라서 사업을 하기에 어려운 점은 없었나?

중국이라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여기도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시행을 하려고 한다. 단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문화가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가면 문화적 차이 때문에 어렵지 않던가. 여기도 한국과는 다른 화장실 문화, 관공서 문화 등이 존재한다. 한국에서도 30, 40년 전에는 관공서 일을 보는 것이 독립운동보다 어렵다고 했다. 타국의 다름을 이해하고 극복하거나 헤쳐 나가야 할 문제인 것이다. 합리적으로 시행을 하는데 방식이 우리가 이해를 못하는 시각이 있다. 여기를 이해하거나, 여기를 알려고 해야 한다. 여기 법을 따라 가야 한다.

 

11. 타국의 다름을 헤쳐 나가는 방법이 있다면?

이들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무조건 저자세로 나가야 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배우고, 받아들이려고 노려하라. 일이 잘못됐다고 해서 세상 탓, 중국 탓만 하는 것을 옳지 않다. 자기반성을 모르고 자기 잣대로 주변과 상황을 판단하는 사람 치고 성공하는 사람 못 봤다.

 

12. 연태는 어떤 곳인가?

연태의 인구는 800만 정도이고 이 안에 다섯 개의 시가 있다. 연태는 한국과 매우 가까운 곳이다. 나는 한국의 변두리에 살고 있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중국어를 못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업을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이다. 한국의 언론과 정보에 늘 관심을 갖고 있다. 촛불집회 때도 우리 손자까지 모두 참여를 했다. 여기서 광화문 광장을 갔다 왔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 비해 사람들의 수준이 굉장히 높은 편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여기는 안정적인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90% 이상이 대기업의 주재원들이기 때문에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국제학교가 매우 발달되어 있다. 한국 문교부의 교사 파견, 시설 등의 지원도 가장 많고, 수준도 높다. 사람들의 행동이나 움직임도 매우 신사적이고 점잖은 편이다.

 

13.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나는 개인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진출했으면 좋겠다. 앞으로 중국 내의 한국인들의 역량이 커지려면 올바른 사고와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 대거 진출을 해야 한다. 중국은 분명 한국보다 비전이 큰 곳이다. 특히 연태는 교통이 전 세계에서 가장 좋은 곳이다. 항만, 공항, 고속철, 고속도로가 매우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업무자재나 인력 공급이 수월한 환경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단, 특별한 노하우나 자본, 장인정신이 구비되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단순히 인력만으로 경쟁을 해서는 안 된다. 가령, 한국에서 산업화가 시작될 때 99%가 일본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준비를 하고, 능력을 갖추어 그들의 자리를 모두 차지했다. 한국 시장을 장악했던 일본인들은 0.001%도 안 남고 모두 철수해 버렸다. 여기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많은 한국인들이 분포되어 있지만, 특별한 노하우와 자본 등으로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뒤쫓아 오는 중국인들을 이길 수가 없다.

 

14. 앞으로의 비전은 무엇인가?

올해 내가 61세 회갑이 되었다. 인생의 반절을 돌아보며 근신하는 마음으로 산에 다니고 있다. 가끔 한국에 나가 손자를 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내 자신이 걸어 온 발자취를 돌아  보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절실히 깨닫는 시간을 갖고 싶다. 인생은 60부터라 하지 않았던가. 충분한 근신의 시간을 가진 후, 농사도 짓고, 더 많이 나누고 베풀면서 제2막의 인생을 시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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