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 구-

아버지 따라 선산에 가고 친구 따라 강남에 간다.

이제껏 살아온 날 대부분은 친구 아니면, 친구 같은 형들과 친구 같은 아우들을 좋아하면서 보낸 세월들이다.

초등시절에는 여름날 들판 한가운데 연못에 가서 수영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땀이 나면, 또다시 연못으로 발길을 돌려 수영을 즐기다가 식사 시간을 한참이나 넘기고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친구가 흙 묻은 발을 씻고 곡예를 하듯 아랫도리를 걸치면 장난으로 등짝에 진흙 한줌 발라 두면 흙 묻은 등짝을 씻기 위하여 할 수 없이 어렵게 걸친 옷을 벗고 물로 다시 들어가도록 해놓고 낄낄거리던 일들이 눈에 선하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친구와 함께 성인용 자전거의 삼각공간으로 다리를 넣어 옆으로 매달린 자세로, 뒷자리에 나를 싣고 20리길이나 되는 비포장도로를 달려 친구 아버지 농장을 향하였던 추억이 있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해가 서산에 걸릴 쯤에야 겨우 도착을 하였지만, 너무나 맛있는 저녁과 과일 등으로 그야말로 푸짐하고 따뜻한 대접을 받고서 집으로 돌아온 이후 몇 년간 친구의 고마운 정을 내내 잊지 못하였다.

중등시절에는 가을 수확을 마친 친구 집에서 날마다 하얀 쌀밥을 맛있게 먹고, 집에 와서는 커피를 가마솥에 끓여 밥그릇에 나누어 마셨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무렵, 방앗간을 하면서 그렇게도 잘살던 친구 집은 부도가 나고 얼마나 급했던지 자식들마저 버려두고 부모들은 봇짐을 싸고 멀리 잠적하였다.

갈 곳이 없었던 친구는 내게로 왔다.

작은방에 친구를 숨겨놓고 보름정도 지났을 무렵 우연히 아버님께 발각이 되고 말았는데, 남의 돈을 떼어먹은 도둑의 자식과 논다면서 노발대발 하셨다.

친구는 허겁지겁 서둘러 망망한 세상 어딘가로 떠나가고 흐르는 눈물이 앞을 가린 채 가엾은 친구를 그냥 바라다 볼 뿐이었다.

군 생활도 마치고 성년이 되자 우리는 초등학교 동창회를 만들고 친구가 이 세상에 전부인 것처럼 라이온스 클럽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틈만 나면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고 장기, 바둑, 낚시를 즐겼다.

어느 날 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밥통의 바닥이 보일 때까지 나누어먹고 큰방, 작은방, 마루에 흩어져 낮잠을 즐겼다.

잠결에 “상놈의 새끼 낮잠도 놉(삯일꾼) 얻어서 잔다”는 아버님의 호통소리에 놀라 슬금슬금 도망을 나왔는데, 지금도 그때의 친구들을 만나면 박장대소를 한다.

유난히 잘 생겼는데 성품도 좋던 친구는 동창회장을 맡았다.

딸도 하나 두고 동네 슈퍼를 운영하면서 단란하게 살던 어느 날, 중장비를 예술적으로 다루어 3000대 1의 경쟁을 뚫고 현대건설에 입사한 후 중동에 가서 큰돈을 벌어온 친구가 125cc 오토바이를 사서, 날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내가 발령장을 받아 초겨울에 원주로 떠났다가 이듬해 봄 휴가를 온 날 친구는 충청도에 있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고향으로 달려왔다.

서로 만나지 못하고 숨바꼭질을 하는 동안 해가 진 나주대교를 택시를 타고 건너 금천면으로 향하는 길목에 교통사고를 목격하였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친구가 운전하던 오토바이에 다른 친구가 뒤에 타고 넘어진 바로 그 사고였다.

앞에 있던 친구는 오른 팔이 불구가 되었고, 뒤에 있던 친구는 머리를 다쳐 3개월간 의식을 찾지 못하다 기적적으로 깨어났으나 끝내 불구를 면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인가 나주 부모님께 들렀다 목포로 향하는 버스에서 옆자리의 사나이가 자꾸만 쳐다보는 것을 무심코 고개를 돌려보니 뇌수술을 받아 몸의 자유를 잃고 처자식으로부터 버림 받은 그 소식을 몰랐던 친구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심한 버스가 다시 면에 도착하자 친구는 어렵사리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가지고 갈 짐이 많아 아쉬운 마음을 꾹 참고 그대로 작별을 고했다.

버스가 학교면 삼거리 정류장에 도착하자 도저히 참지 못하고 무거운 짐들과 함께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다시면으로 되돌아갔다.

이리 저리 수소문하여 시골 다방에 있던 친구를 만났다.

중화요리 집으로 가서 짜장 면과 탕수육을 시켜 먹으면서 독한 술잔을 기울이는데, 겉으로는 웃었지만 마음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중에 목포에 놀러 오라고 두 손을 잡고 몇 번이나 당부를 하였다.

아마 1988년도로 기억이 되는데 12월 30일 한해 예산집행의 마지막 국고수표를 발행하느라 정신이 없던 중 친구가 사무실 앞에서 전화를 하였다.

계속 기다리라 해놓고 허둥지둥 2시간이 지난 뒤 길 다방에 가보니 친구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드넓은 세상 어딘가로 떠나가고 없었다.

그 이후로 친구의 소식을 들을 수도 없거니와 행적을 아는 사람도 끝내 없었다.

2007. 12월경 광주에 근무할 당시에도 사업에 실패하여 날마다 술로 지낸다는 친구가 초롱초롱한 목소리로 사무실 앞에서 전화를 하였다.

그때도 하필이면 급박하게 제출할 보고서로 정신이 하나도 없던 때라 마침 부근에 근무하는 다른 친구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동분서주하여 우여곡절 끝에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한 다음 연락해보니 다시는 통화가 되지 않았다.

이 세상 누구보다 친구를 좋아했던 나에게는 너무나 큰 아픔이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안타까움과 허전함으로 인생이 서글퍼지기도 한다.

내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수많은 친구를 좋아하는 것은 아마 인간을 좋아하는 근본이유도 되겠지만, 내가 유난히 술을 좋아하는 이면에는 술보다 좋은 인간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다보면 정작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히는 일이 벌어진다.

술로 인하여 벌어진 애절한 사연들과 알게 모르게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쓰라린 회환들은 이따금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들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친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향한 안타까운 나의 사랑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인지는 아무래도 새 털 구름과도 같은 무상한 세월이 더 흘러봐야 알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저작권자 © 엔디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