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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익조연리지 (比翼鳥連理枝) (1)

비익조연리지 (比翼鳥連理枝) (1)

 

박영동 칼럼( 현 법무사/전남인터넷신문 회장)

 

우리는 세상을 무심코 살아가면서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새기지 않아 혼용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똑같은 칼이지만 “검”은 양날이 있는 것을 말하고 “도”는 등이 있고 한쪽의 날만 있는 칼을 의미한다.

봉황을 그려 놓은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봉황”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왼쪽의 귀한 새가 “봉”이요 오른쪽의 새가 “황”이라 한다.

조선시대 첩의 자손들을 “서얼”이라 하였는데 이 또한 양인의 첩 자손을 “서”라 하였고 천인의 첩 자손을 “얼”이라 하였다.

“비익조연리지”를 줄여서 “비익연리”라 하였다는데 “비익조”는 날개와 눈이 하나인 전설상의 새로써 암컷과 수컷이 결합하여 하나의 몸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늘을 날수 있다고 한다.

“연리지”는 뿌리가 다른 나무의 가지가 서로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고 생활하여 각 개체의 특성은 유지하지만 한쪽이 약하면 다른 쪽이 영양분을 공급하여 서로 부양하여 살아가는 현실의 나무를 일컫는 말이다.

요사이 시절이 너무도 좋은지는 몰라도 결혼 청첩장의 홍수 속에 살아가면서 친분 있는 사람들의 자녀들이 서로 100년의 가약을 맺어 “비익조연리지”처럼 완전히 한 몸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서기도 한다.

우리는 때로 완벽한 사랑을 꿈꾸어 보기도 하였지만 현실에 괴리가 있었고 가변적인 현실에 부딪혀 미처 이루지 못한 아픔으로 자신을 되돌아보며 씁쓸한 감회에 젖어보기도 하였을 것이다.

고구려의 2대 황제 유리왕은 화희부인과 치희부인간의 다툼사이에 치희가 자신을 버리고 가버리자 애틋함을 달래지 못하여 “저기 노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 외로워라 이내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까”라는 “황조가”를 지어 제왕인 자신도 마음대로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애환을 노래로 풀고 있다.

고려 충렬왕은 연경에서 생활하는 동안 연나라 여인과 사랑에 빠진 후 헤어지는데 손에 연꽃 하나를 쥐어 주며 ‘상께서 돌아가시는데 이 꽃을 보시고 혹시 시들면 이 목숨 다하는 것으로 아십시오’하고 며칠이 지나자 꽃이 초췌한지라 왕이 마음 약해 돌아가려 하였다.

이에 충신 “존비”는 만류하고 자신이 가보겠다 하여 연나라 여인을 만나니 “서로 바친 연꽃의 향기여/ 처음에는 붉은 빛 싱싱하였지/ 가지를 갈라 며칠이 지나니 / 초췌하기가 님과 같아라”는 시를 전하도록 하였다.

충신은 “어리석은 사람아, 어리석은 사람아,/ 수레를 멈출 것 없다오/ 이 몸이야 연잎에 이슬 같아/ 거기서 구르면 여기서 둥글다오.” 라고 권사(權辭)하여 바치니 왕이 실망하여 마침내 귀국하였다.

뒷날 연나라 여인을 계속하여 원망하므로 “존비”는 가슴이 아파 “신이 봉환을 서두르기 위하여 임금을 속였으니 죄를 달라” 고백하자 연인에 대한 정이 깊은 왕은 노하여 관직을 뺏고 유배를 보냈다.

이에 태자와 조신이 왕께 충신의 뜻을 간언하여 관직을 회복시켜 소환하였으나 사자가 당도하기 전에 유명을 달리하였으니 자태가 미색인 여인으로 인한 비극이었다.

무릇 고대사의 현장에는 미색이 뛰어난 여인들로 인한 현기증 나는 희로애락의 이야기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와신상담’ ‘오월동주’의 주인공들인 오의 ‘부차’와 월의 ‘구천’은 역사상 가장 처절하게 대립하였던 인물들이다.

오나라에 의하여 나라를 잃었던 월 구천과 그 신하 범려는 의지를 굳히기 위하여 짐승의 쓸개를 빨면서 권토중래를 노리는 동안 그 비책으로 나무꾼의 딸로 태어났지만 미모가 너무나도 빼어난 “서시”라는 여인을 호색한인 부차에게 바쳐 정치를 태만히 하도록 하였다.

그 사이 구천은 몰래 힘을 길러 오나라를 멸망 시켰으니 여인의 미색으로 일국을 도모하게 된 것이다.

“서시”가 심장질환으로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 너무도 매력적이어서 당시 여인들이 덩달아 서시를 따라 얼굴을 찌푸렸다고 한다.

개울가에서 손수건을 씻는 서시를 보고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고 물속에 가라 앉아 “침어”라 하였다니 가히 자색의 뛰어남이 어떠하였는지 미루어 짐작이 갈 뿐이다.

서한 원제의 후궁으로 5년간의 허송세월을 보내다 흉노의 호한야 선우(왕)의 아내가 되어 아들 하나를 낳았다가 호한야의 죽음으로 다시 남편의 본처 아들인 복주루 선우(왕)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으면서 풍운의 일생을 살아간 “왕 소군”의 인물 또한 얼마나 출중하였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궁녀가 3,000에 이르러 황제가 일일이 대면을 할 수가 없으므로 ‘모연수’라는 화가에게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였는데, 돈이 없는 왕 소군은 화가에게 뇌물을 바치지 못하여 초상화가 실물보다 추하게 그려져 흉노의 왕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뒤늦게 말을 타고 궁궐을 나서는 왕 소군의 빼어난 미모를 알게 된 황제는 너무나 애석하여 화가를 참형에 처했다고 한다.

변방에 봄이 왔음에도 꽃과 산록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여 남쪽을 바라보며 “춘래 불사춘”(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도다)이라는 명언을 남겼으며, 고향에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악기를 연주하자 그 소리에 얼이 빠진 기러기가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지므로 “낙안”이라 칭하였다 한다.

박영동  jun856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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