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여천의 시그림자] 냉장고속 바다
[양여천의 시그림자] 냉장고속 바다
  • 양여천 시인
  • 승인 2017.09.08 02: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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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sea 2
한기호 作
회화 (채색, 캔버스, 아크릴) 
(세로) 72.0 * (가로) 60.0 cm

 

냉장고속 바다 / 양여천 시인

 

다시 문 열면 눈을 뜨는 불빛처럼, 꿈이 좀 깨고 의식이 들었니?
냉장고 깊숙이 감춰두었던 청어에게 물었다
네 피는 파란 바다 얼지 않았겠지, 시장에서 살 때는 신선했었는데
청어의 아가리 문 열자 그곳에서 우수수 힘이 밀고 들어온다
너무 많은 것을 넣어두었나보다, 문을 밀고 나오는 바다를 떠밀며 나는 문을 다시 닫았다. 내 기억속에 더 담아둘 수 없는 것처럼
기한이 정해진 삶이 마치 통조림안에 꼭꼭 눌러 담았다가 물위에 띄워놓고 누가 따줄때까지 넌 변질되지 않는거야 하고
냉장고안에 얼려두면 변하지 않을 줄 알았다. 난 어리석게
바다도 김서린 구름으로 증발하는 것을
문을 열때까지 나는 내 기억의 용적이 아직 그것을 담아둘 수 있을줄만 알았다.

너무 오래 산 걸까? 기억할 수 없는 나날을 파도가 더듬거리자 나는 말했다.
흔적없는 달빛을 가물거리면 눈물을 머금고, 가끔 거품을 내뿜기도 하는 차가운 에테르를 마시면 잊혀질 줄 알았지
그래서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넣어놨었는데, 이제 나를 조각배처럼 살아가라고 어깨를 떠밀고 가는구나
추억의 힘에 의지해서 사람은 그렇게 침몰할 듯한 현실로 부상(浮上)하는 것이겠지

만선(滿船)의 꿈만 꾸라고 담가두었던 냉장고에서 얼음을 풀어 거칠고 거칠게 일렁이는 바다로의 항해를 지우고 결국은 해빙(解氷)시켜야 했다.

 

 

 

양여천 시인  xaiy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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