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서

 

눈을 뜨니

그 곳에 있었습니다

끈적이는 안개가 가마솥 수증기처럼 피어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거든요

바람소리와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대는 듯한

깊고 눅눅한 울림만 가끔 들려왔습니다

풀은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눈 뜬다 한들 안개에 묻힌 세상에

차라리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나았습니다

밝게 빛나던 날

마침내 긴 잠에서 깬 듯한 상쾌함이 찾아왔습니다

기쁨에 겨워 주위를 둘러보니

천길 벼랑 끝에 매달려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제야 주변이 고요하고

오랜 동안 안개가 가득했던 까닭을 알 수 있었죠

절벽에는 듬성듬성 이끼가 조금 남아 있을 뿐

나무한그루 보이지 않았습니다

있는 힘껏 불러 보았지만 아무도 대답 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밝고 공허한 쓸쓸함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어떻게 이런 곳에 뿌리를 내렸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는 왜 이런 곳에 싹을 틔었지

왜 홀로 남겨 졌을까

풀은 세상을 원망했습니다

삶을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살아 있어야할 이유가 없었거든요

몸을 날리려고 했지만 바위 틈새에 꽉 박힌 뿌리가

마지막 자유를 옭아맸습니다

 

머리가 빠개질듯 한 두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점점 더 심해지더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간헐적으로 이어졌습니다

달빛이 안개처럼 가득 드리우던 날

하얗고 자주 빛 섞인 꽃이 피었습니다

풀은 자신이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저 볼품없는 잡초라 생각했거든요

 

벌 한마리가 날아왔습니다

 

향기가 얼마나 강하고 싱그러운지

수많은 벌들이 너를 보려고 한단다

모두 향기에 취해 이곳에 오고 싶어 안달이지

하지만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굳은 의지 없이는 너를 볼 수 없단다

선택받은 소수만이 네 향기와 꽃을 볼 수 있단다

 

며칠 뒤 나비가 날아 왔습니다

나비도 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저 먼 곳에서 벼랑에 꽃 피운 너를 꿈꾼단다

강인한 날개와 순풍 없이는 불가능하지

넌 우리가 이렇게 높은 곳을 향해 날아오르게 하는

 

희망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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