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한풀이와 단합의 자리

【수도권=ndnnews】안홍필 기자 = 현재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에 위치한 웃터골운동장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천연분지였다. 이곳은 러일전쟁 당시 철도감부(지금의 철도청)의 합숙소가 되었다가 인천부 소유가 된 땅으로 골짜기 전체가 작은 소나무 숲을 이루고 있어서 자연스레 인천 사람들이 즐겨 찾던 공간이었다.

개항 후 일본인의 진출이 많았던 인천은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에 대한 민족적 차별에 시달렸고 자연 이에 대한 저항도 강했던 곳이다.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일제의 무단정치가 문화정치로 바뀌었고 언론 출판의 허가와 한글의 사용, 집회·결사를 허용했으나 그 내면에는 한국인의 민족운동을 겉으로 드러내게 한 후 거기에 맞춰 통제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인천에 최초의 공설운동장이 세워졌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웃터골’이 보다 구체적인 운동장의 모습을 갖추며 확장된 시기는 1920년으로, 인천부는 조선체육협회와 용산철도 야구부의 협조로 웃터골을 넓혀 이해 11월 공설운동장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것은 서울의 경성 공설운동장보다 6년이나 빠르게 건립된 것으로 실로 한국 최초의 공설운동장이었다. 시설과 규모면에서는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한국 최초로 등장한 실험적 체육공간이었다.

이때를 계기로 조선의 독립을 위한 정신적 단결과 체력 배양을 위해 운동회를 개최하고 체육단체를 조직했다. 해마다 봄·가을 각급 학교 대운동회와 연합체육제전도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 웃터골운동장은 그저 단순한 스포츠 경기장이 아니었다. 고단한 식민지 민중의 쉼터면서 울분을 삭이던 곳이었다. 때문에 일제는 이런 저런 핑계로 연합운동회 중지를 강요하기도 하였다.

이 시대를 풍미하던 한용단(漢勇團)은 서울의 양정이나 배재, 중앙, 휘문 등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경인철도를 타고 한강을 오가며 국권회복에 대한 염원을 모아 만든 조직이었다. 그들은 인천의 희망이었고 미래의 등불이었다. 이들의 경기가 있을 때면 온 인천이 들썩였고, 웃터골운동장은 일제의 의도와는 다르게 인천 조선인들의 환호와 감동, 한풀이와 단합의 자리였다.

웃터골운동장은 한국 체육의 성지이고 인천 체육의 메카였다. 이후 1936년 인천공설운동장(도원동)으로 이전하기까지 각종의 야구, 축구, 육상 경기는 물론 각 학교의 대운동회가 연중 끊임없이 열렸다. 그곳은 인천의 애국 투사들을 육성한 곳으로 광복이 올 날을 기다리는 인천 시민들의 안식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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