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와 전보의 시작

【수도권=ndnnews】안홍필 기자 = 우리나라에 전화기가 처음 소개된 것은 1882년 청국에 파견된 유학생에 의해서였고, 정식으로 도입된 것은 1894년 1월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국내 사정으로 개통된 것은 4년 뒤인 1898년이었다. 당시 각 아문(衙門)과의 연락을 위해 덕수궁에 전화시설을 마련했는데, 1월 28일 인천항 감리가 “ 오후 3시에 영국 범선 3척이 입항 할 것”이라고 외아문에 보고한 것에서 최초의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관용전화와 달리 일반인에게 전화가 보급된 것은 1902년 3월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가 가설되면서였다. 같은 해 6월 시내 교환전화가 가설되며 인천우편국에서 전화교환 사무를 시작했고, 1904년에는 인천정거장과 우편국 앞에 자동전화를 설치하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전화를 ‘텔레폰’의 가차명(假借名)인 ‘덕률풍(德律風)’,‘득률풍(得律風)’으로 또는‘말을 전하는 통’이라는 뜻에서 ‘전어통(傳語筒)’등으로 불렀다.

『한국전기통신 100년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화 가입자를 대한천일은행 본점과 인천 지점으로 기록하고 있다. 인천전화소가 교환 업무를 개시한 때가 1903년 2월 17일로, 이 날이 대한천일은행 본점과 지점 사이에 전화가 개통된 날인 동시에 한국 최초의 전화 가입이 이루어진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보의 경우, 청국이 일본과의 각축 과정을 거쳐 1885년 6월 인천-서울-평양-의주를 잇는 ‘서로전선(西路電線)’부설권과 독점운영권을 획득하고, 인천 청국이사청 내에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 발발과 함께 전신망을 일본이 군용으로 독점하면서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전쟁 후, 조선 정부가 전선 복구 작업에 착수하면서 1897년 7월 ‘서로전신선’의 운영권을 갖게 되었다.

앞서 1894년 12월 1일 인천우편국에서 일반인들의 전보를 취급하기 시작했지만, 우리말로 된 전보는 광복 후인 1946년 1월 1일부터 가능했다고 한다. 전보는 일어, 유럽어, 한글 3종류였는데 전보통수에서 일어가 유럽어나 한글에 비해 약 1천배 가량 많이 사용됐다. 그래서 “우리말의 전보를 인천우편국에서 취급하므로 일반은 일본말 전보를 업새고 우리말 전보로 해주고, 인천국에서는 일반의 국문 전보 취급에 협력 해주기 바란다”라는 기사를 통해 당시에도 일어 전보를 여전히 많이 사용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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