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초등학생이던 1950년대 말~‘60년대 초, 우리들 철부지는 매일 아침 운동장에서 조회할 때마다 애국가를 4절까지 목청껏 불렀다. 애국가 가사에 담긴 어려운 뜻도 잘 모른 채였다. 당시 필자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남산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선지 애국가 가사 2절 첫 소절 ’남산 위에 저 소나무‘를 부를 땐 목소리가 더 커졌던 기억이 난다.

초‧중학교 음악 시간에는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과 같은 4대 국경일(지금은 한글날까지 5대 국경일임) 노래부터 배웠다. 학교에서 열린 기념식 때 가사를 보지 않고도 부르면서 우리는 절로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본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이러한 기념식을 하지 않게 된 요즈음 학생들은 국경일 노래를 부를 기회조차 없다. 우리 국경일은 조상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이를 통해 국민의 애국심과 단결을 함양하는 국가의 경사스러운 날이 되지 못한 채 그저 하루 노는 날로 전락하고 말았다.

언제부턴가 각종 행사 국민의례 때 ‘시간 관계상’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애국가 제창을 생략하거나 마지못해 1절만 부르고 있다. 그리곤 실제 별 관심도 없는 ‘내빈 소개’는 모든 의전을 따져 많은 시간을 할애해 거창하게 한다. 과연 우리에게 ‘애국’만큼 중요한 가치가 있는가, 애국가 제창보다 내빈 소개가 더 우선 하는지 되묻고 싶다. 국경일 노래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않으니 젊은 사람들은 따라 부르지도 못하고 있다. 애국과 인성은 도외시한 성적 위주의 한심한 우리 교육 현주소다.

애국가하면 도산 안창호 선생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도산 선생은 1900년대 초 미국에서 독립운동 할 당시 미국사람들이 각종 모임에서 합창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다. 도산 선생은 노래를 함께 부를 때 조직의 단결과 조직원 간 단합의 힘이 커짐을 깨달았다고 한다. 도산 선생은 귀국 후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각종 모임에서 노래를 불러 흥을 돋우고 하나 된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도산 안창호전› 제6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상해 임시정부 시절 국무원은 매일 아침 조회 시 태극기를 게양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로 시작되는 애국가를 합창하였다. 도산은 그 웅장한 음성으로 힘을 다해 애국가를 불렀다. 원래 애국가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애국가가 널리 불려서 국가(國歌)를 대신하게 됨에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도산 선생의 공(功)은 남에게 돌리던 미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애국가의 유력 작사자 중 한 사람으로 도산이 꼽히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지난 3월1일 망우리묘원에서 도산 선생 비석 이전 제막식이 있었다. 도산 선생의 유해는1973년 강남 도산공원으로 이장되기 전까지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었다. 도산공원으로 유해를 옮기게 되면서 춘원 이광수가 쓴 비석은 제 자리를 빼앗기고 도산기념관 지하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를 망우리 묘역을 정비하면서 그 자리에 다시 세우기로 뜻을 모아 마련된 자리였다. 여기서 도산기념사업회 회원, 흥사단 단원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4절까지 애국가를 제창했다. 지하에 계신 도산 선생도 흐뭇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매주 토요일 광화문을 비롯해 전국에서 100만 명 이상이 모여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규모 면에서 볼 때 정치‧스포츠‧연예계를 막론하고 세계적으로도 초유의 일이라 한다. 과거 폭력적인 시위와 달리 일종의 문화축제처럼 평화적으로 열리고 있어 많은 시민들의 자발적 호응을 얻고 있다.

이 대규모 집회에서 시민들은 애국가를 열창하고 있다. 애국심이 마음속으로부터 절로 생기는 것이다. 이 애국가는 이제까지 필자가 들어본 어느 것보다 우렁차고 뜨거운 것이었다. 이번 촛불집회가 앞으로 애국가와 국경일 노래가 우리 국민 곁에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사랑받는 노래로 정착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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