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 해질녁
천현태 作
회화 (채색, 캔버스, 유채) (세로) 65.0 * (가로) 91.0 cm

 

바람의 주소                          / 양여천 시인

 

 

방금 그가 다녀갔던 자리에
벗어놓은 낙엽들이 외투처럼 펄럭거린다
그의 걸음은 언제나 확고하고 움직임은 비상하리만큼 단호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겐 언제나 한결같은 장난꾸러기이며
천진난만하기 이를 때 없는 개구쟁이였다

가끔 심심했던 그는 길가에 구르는 먼지 사이를 달려가며 우- 쓸어가기도 하고
비오는 골목 어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뒤에서 나타나 우산을 밀어내며 깔깔거리고 앞서 달려가기도 했다
모든 깃발은 그의 좋은 장난감이었다
그가 깃들어 머리에서부터 목덜미까지 그 천을 두르고 달고
그 끄트머리를 쥐고 하늘에 올랐다 땅에 솟았다 했다
여름이면 문틈사이로 어느새 들어와서 벽을 타고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창문을 열면 어느새 저만치 먼 곳에서 밥짓는 굴뚝의 연기틈새에서 하얗게 이빨을 드러내놓고 웃고 있었다

그가 머물렀던 자리에는 
언제나 그가 신었던 신발들과 양말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어지러운 폭풍끝에서도 그는 감정에 휩싸인 채로 살아가고
생각하지 않는 그대로 움직이며 움직이는 그대로 남기지 않고 살았다
그가 살아갔던 자리마다 수습하는 건 남은 우리네 몫이었다
때론 칼날처럼 매섭게 밥상을 치며 노하기도 했던 그가 우리 곁을 살다가 갔다
때론 봄날의 고양이 숨결보다도 더 간드러지게 꽃잎파리를 끄덕이며 춤추며 살았던 그가 우리 곁을 지나갔다
편지 한 장 끝에 목숨을 태우며 불꽃의 혀를 살라먹던 불똥이 날아간 그 곳이
아마 그가 머무는 다음의 주소가 되지 않았을까?
구름이 무거워 차마 넘지 못하고 눈물에 젖은 고개의 산언저리 안개속에 맴돌던 보라빛 풍란이 그가 남겨놓은 기별은 아닐까?

때론 나도 발없는 그리움을 쫓아
아무곳에나 머물러도 좋고 머무르지 않아도 좋은
당신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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