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구십 노모를 모시고 병원엘 자주 가는 편이다. 이 병원은 서울에서도 두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병원이다. 6개월 내지 1년 전부터 예약되어 있는 시간에 맞춰 가는데도 불구하고 진료실 앞에서 30분 대기하는 것은 다반사다. 그리고 진료는 고작 3분이다. 이러한 ‘30분 대기, 3분 진료’는 우리나라 일류병원이나 유명 대학병원에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필자가 콜롬비아에서 공부할 때니 벌써 30년도 더 지난 얘기다. 갓 돌 정도 지난 큰 애를 데리고 소아과를 찾았다. 디미트리(Dimitri)라는 성을 지닌 그리스 국적의 의사였다. 진료실에는 소아과답게 각종 장난감이 있었다. 당시 그 병원은 30분 단위로 진료 예약을 받고 있었다. 우리나라 3분 진료에 익숙한 필자로서는 선뜻 이해가 안됐다. 어떻게 30분간이나 진료하느냐고 의사에게 물으니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첫 10분은 아이와 의사가 마주보면서 서로 낯을 익히는 시간이고, 그 다음 10분은 본격적인 진료시간, 마지막 10분은 주사도 놓는 등 아픔을 줬으나 다 너를 위해 한 것이니 이해해 달라고 부탁하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시간이란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와 대화하는 것이니 그 어려움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러면서 소아과가 말도 하지 못하는 환자와 소통을 해야 하니 의사 중 제일 어려운 과목(科目)이고 따라서 소아과 의사는 무엇보다 경험이 많아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병원을 나서면서 사람대접 받았다는 기분 좋은 기억이 있다.

귀국 후 소아과 의사를 하고 있던 친구에게 이 얘기를 하니 우리나라에서는 꿈같은 얘기란다. 자기는 하루 최소 150명에서 많게는 200명의 아이를 본다고 했다. 하루 8시간 일할 경우 한 아이 당 2분30초에서 3분 간 진료 하는 꼴이다. 낯선 사람과 환경으로 인해 우는 아이를 달래고 진정시킬 여유도 없이 다짜고짜로 청진기 갖다 대고 주사 한 방 놓고 끝이다. 환자나 보호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들으며 꼼꼼히 진찰하여 차분하게 처방을 내릴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대한보건행정학회지에 의하면 우리나라 대형병원의 외래 평균 진료시간은 초진에 5분, 재진에 4분 정도 소요되었고 진료대기시간은 평균 13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환자나 보호자가 느끼는 체감 진료시간은 이보다 짧고, 대기시간은 이보다 길 것이다. 아무리 숙달된 전문의라 할지라도 3~5분 동안 각종 진료기록이나 영상 검사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문진(問診)과 촉진(觸診)이라는 진료의 본질 대신 각종 검사로 대체하고 환자수를 늘려 병원 경영수익을 올리고 있는 게 우리 병원계의 불편한 진실이다.

미국 병원은 초진에 30분, 재진에 15분 할애하며 병의 난이도에 따라 의사 재량으로 진료시간을 배정할 수 있고 그에 맞춰 진료비를 달리 청구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진료시간에 상관없이 의료기관 규모별로 일정액의 진료비를 받는 구조다. 결국 미국은 환자 맞춤형이고 우리는 병원 중심형이다.

짧은 진료시간도 문제지만 긴 대기시간도 환자나 보호자의 짜증을 일으키게 한다. 의사의 근무시간에 맞춰 환자 당 3~4분 간격으로 기계적으로 진료 예약을 받고 있으니 그 시간 내 진료를 미처 마치지 못하게 될 경우 자연스레 지연되는 것이다. 대학병원의 경우 담당 의사가 학회 참가 등으로 인해 휴진이 예상될 경우 그날 진료분까지 과다 예약을 받아 대기실이 ‘도떼기시장’이 되곤 한다.

현재 서울대병원은 토요일 별도의 외래진료를 개설해 초진에 한해 15분 진료를 하고 있고, 서울시 북부병원은 초진 30분, 재진 10분 이상을 원칙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짧은 진료시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같이 환자의 상태, 질병의 정도에 따라 진료시간과 진료비를 차등 책정하는 ‘시간병산제’의 도입이 필요하다. 또 긴 진료 대기시간 문제는 병원 측이 몸과 마음이 편치 않은 환자의 입장을 고려하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30분 대기, 3분 진료’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의료선진국으로의 길은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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